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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 project/Baryshnikov in Black and White

Baryshnikov in Black and White 22p


 공포가 슬픔이 될 즈음, 바리시니코프는 서방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었고 그것을 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그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라트비아어, 러시아어,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지만 영어는 한 마디도 몰랐다. 그는 뉴욕에 머무르는 첫달동안 TV를 보고 영어를 배웠다.) 그는 또한 머물 곳을 잃어 세상을 붙잡아야만 했기에 결의를 다졌다. 나는 1981년에 소련을 떠난 그의 친구 발레리 고로비처에게 이에 관해 물었다.
 '당신은 이해 못할겁니다. 당시에 러시아를 떠난다는 것은 되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었어요. 당신이 문을 닫아버린 것이지요. 영원히. 그들은 당신을 돌아오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친구, 당신의 거리, 당신의 개도 모두 가버리는 것입니다.'
 서방에서 다른 거리, 다른 개가 있었지만 그것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바리시니코프는 포마라는 커다란 샤기 푸들을 키웠었고, 사랑스러워했다. 그가 캐나다에 가면서 그는 포마를 그의 친구 알라 보에게 두고 왔고, 포마는 그녀와 함께 여생을 보냈다. 그녀의 집 거실 벽에는 바리시니코프와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망명자의 비탄에는 가끔 비난의 요소도 더해졌다. 우리가 흔히 러시아 문학작품에서 보듯 러시아는 운명적으로 불균형적인 감성을 갖고 있는데, 대개 미국인을 제외하고는 완고함만을 지닌 정부 탓으로 피해망상의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위대한 러시아 사상가는(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서구의 가치관을 일상적으로 모욕했다. 당시 유럽 스타일을 신봉하던 다른 예술가들이나(차이코프스키, 프로코피예프), 실제로 유럽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은(투르게네프, 디아길레프, 스트라빈스키) 역적 소리를 들었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실로 그들의 정신적 사명인…- 괴로움이 그들 국가의 일부분이라고 믿었고 그들은 집에 머물며 함께 괴로워했고 더 온건한 나라로 떠나지는 못했다. 솔제니친도 감금당했지만 당국에 의해 쫓겨나고서야 떠났다. 그의 동향인들은 그래서 그를 좋아했다.

 바리시니코프는 과거 소련에서 러시아 소수인종으로 불렸다. (소련에서 전자가 아니라면 여권에 어떤 민족에 속하는지 -러시아인, 유대인, 체첸인, 우크라이나인- 표기해야했고 동유럽인은 우리가 최근의 역사로 알고 있는 그 범주를 진지하게 적어넣어야 했다.) 또한 그는 보기에 러시아인이 아닌듯도 했다. 그는 민족자결주의자가 아니었고, 너무나 총명했다. 더군다나 그의 개인사는 그가 그 길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는 러시아가 아니라 라트비아 출신이었고 그의 어린시절 친구들은 러시아인만큼 라트비아인과 유대인도 있었다. 그는 16세까지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10세까지 그 곳에 살았음에도 그는 그곳에서 지낸 시간 대부분을 여행객처럼 지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달리 말하면 그는 태어날때부터 유랑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러시아인이거나 러시아의 사고를 하는 아이였고 조금은 망명객이기도 했으며 종종 떠나버린 러시아인이라는 비난에 부딪히는 문제가 있었다. 바리시니코프는 '변절자(defector)'라는 단어를 격하게 싫어했다. '변절했다는 말은 결함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니까요.'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문화는 20세기 러시아 발레의 초석에 바리시니코프가 있다는 것조차 언급할 수 없을만큼 대단하다. 우리는 손실을 메꿔나가는 진지함을 계산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