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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 project/包靑天

<우화별-1> 만남

遇和別 1.

날은 맑았다.
해는 내려앉다못해 산 뒤로 숨어들었지만 그 열기만은 식지 않아 숱한 사람들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기도 했지만, 왠지 어른들은 모두 책을 하나씩 손에 들고 다녔다.

그도 그럴것이 이제 3일 후면 과거시험일이었다. 모두들 전답팔고 집팔아 청운의 꿈을 품고 뒤로는 가족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 먼 길을 나서 개봉으로 향했다. 개중에 일찍 개봉에 온 사람들은 적당한 객잔을 잡아 마지막 공부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그래서 객잔은 글읽는 소리로 가득했다.

"주인장, 하루 쉬어갈만한 방 있소?"
"어이구, 손님. 어쩌지요? 곧 과거시험이라 며칠 전부터 꽉 찼습니다요."

방을 찾는 사람은 책도 갖고 있지 않았고, 손가락 마디만 이리저리 짚었다. 얼굴에는 왠지모를 장난기가 남아있어, 조금은 산만하다 싶었는데 옷만은 차분하다 못해 가라앉은듯한 흰색이었다. 그는 실망한듯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주인장, 방 하나 주시오."

앞서 들어선 사람처럼 흰옷을 입은 사람이었는데, 옷이 화려하고 한 손에는 검을 쥔 것이 달랐다. 게다가 가장 큰 차이점은 방을 달라는 말에 대한 객잔주인의 대답이었다.

"아, 오랜만입니다. 백대협. 2층으로 올라가시지요."

나가려던 사람이 멈칫 하다가 곧 다시 주인을 불러 세운다.

"잠깐만, 주인장."
"네?"

올라가려던 주인과 백옥당이 모두 그를 바라본다. 백옥당에게는 휴식을 방해받은듯한 짜증이 옅게 비춰졌다. 하지만 반쯤은 쫓겨났다고도 할 수 있을 사내도 그 정도에 물러날만큼 녹녹하지는 않았다.

"아까 내게는 분명 방이 없다고…"

미안함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는 태도로 답이 나왔다.

"그야 손님은 돈이 없어보이니 그렇죠. 책이 없으니 과객도 아니고, 그저 유랑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무슨 돈이 있겠수? 요즘은 객잔마다 방이 없어서 제일 싼 방도 50냥입니다요. 여기 백대협께서는 개봉에 오실때마다 저희 객잔에 자주 들르셔서 여유가 있는 분이라는 걸 제가 잘 알고 있습지요. 지금 백대협께 보여드릴 방은 저희 객잔에서 최고로 좋은 방이라 100냥짜리고, 지금 그 방밖에는 남지를 않았습니다요."

휘청
같이 올라가려던 사람이 오히려 놀란다. 물론 백수주제에 함공도에 형제들이 사는 덕으로 돈을 펑펑 뿌리면서 호화여행을 아무렇지 않게 다니고 있기는 해도 숙소 하루에 백냥은 과용이었다. 돈이 쓸만큼 있는 것과 남아도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고, 백옥당은 언제나 전자였다. 이 곳, 청운객잔을 그간 이용한 것은 비교적 싼 값에 오래 머물 수 있어서였는데 주인은 백옥당이 돈이 많아서 집에는 안 돌아가고 객잔에 머물면서 노닥거린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정확합니다."

저 쪽 사내는 감탄어린 얼굴로 아예 박수까지 쳤다. 저건 아무리 좋게 봐도 비하인데 정확하다니. 이쯤되면 어이가 없었다. 아니아니, 그보다 이 난관을 타개하는 것이 문제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객잔주인이 백옥당에게 방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배려일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방이 없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길로 내몰려진 사람을 숱하게 보고 온 터였다. 귀티나게 봐 준다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백냥은 너무 비싼 것 같았다. 그나마 빈 방이 있다는 곳조차 여기 하나뿐이었기에 결국 양자택일이었다. 무리수를 두면서 그 비싸다는 방에 묵던가 아니면 길바닥에 나가서 자던가. 소위 공무라는 것을 도와주러 온 게 아닌이상 전조가 개봉부의 방을 내 줄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맞습니다. 제게는 절대 백냥이 없지요. 그런데 저 분은 안색이 좋지 않으시군요."
"아니, 백대협. 어디 편찮으십니까?"

표정에 불안한 마음이 드러났는지 이구동성으로 말을 걸어온다. 백옥당은 언뜻 두 사람이 함께 자신을 놀리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지만 곧 잊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소강절입니다. 대협은 성함을 어찌 부르는지요?"

소강절은 눈치가 빨랐다.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상대의 태도를 보고는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했고 정답을 내놓았다.

"저는 백옥당이라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저와 같은 방에 묵으시겠소? 나도 여러 객잔을 다니다 여기에 온 것이라 잘 아는데, 지금 다른 객잔에 가도 방을 구하기는 어려울거요."

객잔 주인은 소강절에게 돈이 없어보인다고 했지만 백옥당도 나름대로 강호 생활을 하면서 얻은 사람보는 눈이 있었다. 소강절에게는 돈에 비굴하거나 돈에 대한 박탈감에 젖은 분위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백냥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절반쯤은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느정도의 지출은 감수할만한 사람같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천하제일풍류미남검객께서 하늘과 땅을 이불삼아 잠을 청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감사합니다. 백대협, 처음 뵙는 분께 신세를 지는군요."

백옥당의 제안이 솔깃했는지 그는 쉽게 수락한다.

"신세라니요. 그럼 주인장, 안내해주시겠소?"

객잔 주인은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계단을 올라 제일 안쪽 방으로 두 사람을 안내한다. 청운객잔은 개봉 내에서도 규모가 큰 곳이라 방까지 걸어가는데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방 밖으로 나와서 여유롭게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글 읽는 소리는 크게 들려와 귀를 자극했다.

안내받은 방은 확실히 크고 아름다웠다. 벽에는 그림을 여럿 걸어 분위기를 내었고, 일반 객실보다 방이 최소한 두 배는 컸다. 백옥당이 검을 내려놓고 방을 둘러보는 사이 소강절은 주인과 말을 나누고 있었다.

'벌써 돈을 내는걸까? 그럴 필요는 없는데… 어쨌든 잘 됐군.'

주인은 곧 방을 나섰다. 그리고 백옥당의 기대는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으니…

"방값은 내일 나갈때 주면 된다는군요. 이 방은 시설이 좋은데다 2인용이어서 유난히 비싼거랍니다. 그런데, 여기 방 이름이 적혀있군요. 需二鬪凜?"

청운객잔은 원래 방마다 이름을 붙이기로 유명했고, 아주 값싼 방이어도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방의 이름은 보통 꽃 이름이나 유명한 사람이름, 가끔은 자연물의 이름이 붙기도 했다. 방의 차이는 기물의 위치나 모양 등이었지만 값싼 방의 경우 쥐의 마릿수, 벽지가 찢어지거나 곰팡이가 핀 정도 등으로 방의 특성을 구분지었다. 하지만 需二鬪凜이라는 이름은 청운객잔에 자주 묵었던 백옥당으로서도 상당히 의외였다.


"재미있는 이름이군요. 둘이 용감하게 싸우게 되는 곳이라…"

소강절은 탁자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고, 백옥당도 맞은편에 앉았다. 소강절은 앉은 채 방 여러곳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바라봤다. 그림들은 주로 개봉성내의 사람들을 그린 것이었는데, 색을 적게 써서 그런지 화려하기보다는 소박했다. 좋은 그림이기는 했지만 그리 훌륭한 것은 아니어서 백냥짜리 방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는 머릿속으로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 다른 한 사람에게는 어색한 침묵이었고, 그는 그걸 참을 뜻이 없었다.

"소선생은 무슨 일로 개봉에 오셨습니까?"
"하하, 무슨 일로 왔을 것 같습니까?"

얼른 대답을 하지 않고 상대에게 되묻는 것, 이것이 이 사람의 버릇일까? 가벼운 질문에 대답을 회피하는 게 꼭 그렇게 보였지만 소강절의 얼굴에서 숨김이나 거짓같은 것은 비치지 않았다. 백옥당도 딱히 짐작가는 것은 없었기에 아까 객잔주인이 했던 말을 조금 바꿔서 옮긴다.

"잘은 모르겠지만, 과거에 응시하러 오신 것은 아닐테지요."
"맞습니다. 잠시 유랑하던 차에 개봉부 분들을 한번 만날까하여 들렀습니다. 다들 잘 계신가 해서요."

백옥당의 눈이 약간 커진다. 개봉부 사람들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인물을 우연히 만난것이 흥미롭기도 했고, 약간은 신기하기도 했다.

"개봉부에 전에도 가셨었군요."
"네, 포대인께서 저를 부르셨었지요. 그런데 백대협께서는 왜 개봉에 오셨습니까?"

'포대인을 찾아간 게 아니라 포대인이 불렀다니 가벼이 여길 사람은 아니구나. 대체 어떤 사람일까?'라 생각하며 좀 더 물어보려는데 뒤이어 떨어지는 질문에 백옥당은 의문을 잊고 가만히 대답한다.

"아… 저는 고양이를 만나러요."

호기롭게 던지는 말에 소강절이 약간 갸웃한다. 백옥당이야 고양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고유명사로 쓰지만 소강절이야 매우 일반적인 보통명사로만 알고 있었으니 당연히 의아하리라.

"고양이라고요? 개봉의 고양이는 타지 고양이와 뭔가 다른가요?"
"네? 고양이를 모르신단 말입니까?"

개봉부를 찾아왔다는 이 사내. 고양이를 모른다. 어쩌면 전조는 알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고양이는 모른다. 백옥당은 괜스레 소강절이라는 이 사람에게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네, 다르지요. 개봉의 고양이는 쥐를 못잡거든요."
"쥐를 못 잡아요? 확실히 신기하군요."

백옥당은 철저히 자기 기준에서 사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백옥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소강절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이제 눈까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백옥당은 그런 소강절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집고양이라서 아마 쥐를 못 잡아도 잘 먹고 잘 사는 모양입니다. 집주인이 마음씨가 좋은거지요. 어찌 지낼지 궁금해서 오랜만에 와 봤습니다."

자신의 말에 감탄한 백옥당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쥐 하나 못잡는 무능하고 허약한 고양이'로 규정지어 버리는 게 의외로 재미있었다.

"저도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미물인 고양이가 생명의 값을 알고 감히 해치지 않으니 참으로 인(仁)을 실천하는 고양이가 아닙니까?"
"네?"

소강절이라는 이 사람, 백옥당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고양이 주제에 쥐를 잡지 못한다면 그건 무능하고 형편없는 고양이일 뿐이다. 고양이가 쥐를 잡지 않아서 굶어죽으면, 혹은 주인에게 구박을 받으면 그건 고양이의 멍청함 탓이지, 고양이가 착한 탓이 아니다. 그런데도 쥐의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에 쥐를 잡지 않는다고?

"그렇지 않습니까? 고양이는 결코 쥐보다 약해서 쥐를 잡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어느 고양이가 쥐보다 약하면서도 주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에게 잡히면 어디론가 내쳐지거나 죽어야하는 쥐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일부러 놓아두는 거겠지요. 고양이로서 그처럼 생각이 깊다니 경탄할 일입니다. 고양이는 언제 찾아보실 생각인가요? 괜찮다면 제게 소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백옥당은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잘못했길래 이런 사태를 만들었는지 곰곰이 따져봤지만 떠올려 무엇하랴. 일은 이미 다 저지른 다음이었다.

"피곤하군요. 저는 먼저 자겠습니다. 내일 고양이를 만나러 가실 때 제가 자고 있거든 깨워주시겠습니까?"
"아, 예예. 그… 그러지요."

백옥당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소강절이 희망찬 모습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소강절이 잠자리에 들자 백옥당도 다른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어쨌든 백옥당은, 전조가 이 대화를 알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걱정은 여전히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