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yshnikov in Black and White 21p
소련 당국은 바리시니코프가 그저 휴가를 떠났으며 세계로 돌아갔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의 아파트를 몇년동안 그대로 두었다.) 그래서 그들은 러시아 발레사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의 사진은 학교 벽에서 내려졌고 그의 잡지기사는 더이상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1981년에 모스크바에서 공식 발레 백과사전이 출간되었는데, 거기에 그의 이름은 없었고 그가 해낸 일은 그의 후임 이름으로 교체되어 올라갔다. 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크라소브스카야의 선견지명이 있던 에세이는 바리시니코프가 망명했을 때 아직 출간되지 않고 있었는데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이것은 1993년까지 세상에 나오지 못했고 글라스노스트 이후 아를린 크로체의 글이 출판되지만 그 때를(6월 8일) 지난 후였다. 그 후, 바리시니코프는 곧 미국에 데뷔하고 크로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앞질러 글을 썼다.
'바리시니코프의 춤을 처음 보았을 때 현 시대의 남성 고전 발레 스타일에서 아직 말할 수 없는 가능성의 문이 미래로 열리는 것을 보았다.'
바리시니코프는 문을 천천히 고통스럽게 열었다. 당시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망명이 그에게 심리적 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첫째로 이는 매우 위험했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마 소비에트 감옥에 갇혔을 것이다. 어떻게 되더라도 그의 경력은 끝장날 수 있었다. 그에게 망명에 대해 언급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의 친구 루돌프 누레예프의 경우 간접적으로 언급된 기사가 있었다.
'루돌프의 망명은 범세계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몇년간 고민을 하고 의구심을 갖고 계획하면서 용기를 갖고 조금씩 준비했다. 하지만 루돌프에게는 용기가 필요치 않았다. 그는 너무도 용감해서 더 이상의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공항에서 이탈해 새처럼 새장 안에 들어갔고 곧 문이 열렸다. 그가 뭘 했냐고? 물론 훨훨 날아갔다.'
바리시니코프는 누레예프와 달라 그냥 날아갈 수 없었고 그가 누릴 행복에 대한 희망보다 걱정이 더 컸다. 그는 남겨둔 아버지, 이복형제들, 친구들과 같은 가족을 잃었다. 소비에트 당국이 친척들을 나쁘게 대하고 처벌했다는 이야기는 나돌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알렸다. 망명 이후 몇년간 바리시니코프는 소련에 불리한 말을 공개적으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 머무르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