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협30제+
■ 30제 - 8.편지
■ 인물 - 전조
■ 장소 - 시장
■ 아이템 - 꽃
■ 엔딩 - 해피엔딩
"삼형, 대체 이 술은 뭐요? 향이며 맛이며 기가 막히는 이런 술을 대체 지금까지 어디다 숨겨뒀다 이제 꺼내주는 거요?"
백옥당이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부리며 말하자 서경은 저도 모르게 흠칫 뒤로 물러났다. 당혹스러움이 잔뜩 밴 어조로 백옥당에게 답했다.
"몰…랐냐? 형수님이 한달쯤 전부터 만든 술이야. 무슨 꽃을 써서 만들었다지, 아마?"
"꽃? 꽃으로도 술을 만들 수 있다고요?"
"글쎄. 난 잘 모르니, 자세한건 형수님께 여쭤보라고."
서경은 마지막 술을 얼른 삼켜버렸다. 백옥당은 아쉬워했지만, 서경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버드나무의 늘어진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 백옥당은 서경이 딱 한 잔 나눠준 그 술에 마음을 꽉 틀어잡히고 말았다. 원래 미각에 충실한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발견하면 앞뒤 못가리고 덤벼드는 법. 당장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민수수에게 달려갔다.
"형수님, 꽃으로 술을 담그셨다면서요?"
민수수가 그릇을 닦아내면서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 대답했다.
"아, 그건 왜…?"
백옥당이 민수수 옆에 푹 소리가 날 정도로 주저앉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형수님이 담근 술맛이 기막히던데, 남은 거 있으면 조금이라도 주면 안될까 싶어서요."
"도련님, 어쩌지요? 나도 이번에 처음 담가본거라 조금밖에 안했거든요. 기껏 담갔더니만 도주님은 화주를 좋아하지 않으시더군요. 그래서 요즘 싸우고 있어요. 아내가 힘들게 한 걸 그렇게 내치다니 어떻게 그럴수가 있는지…"
사실 백옥당은 노방과 민수수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고, 지금은 관심도 없었다.
"아, 그럼 많이 남았겠네요."
"이제가 개봉으로 갈 때 가져간다며 조금 가져갔고, 삼제가 달라기에 남은 걸 다 줬으니 삼제에게 한번 가 보시지요."
백옥당은 방금 서경에게 그 술을 얻어먹고 오는 길이 아니었겠나. 간다고 한들 술 한 방울 안 나올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백옥당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백옥당이 노방의 가정사에 일순간 무심하기는 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민수수가 담근 술 때문에 노방과의 사이가 나빠진 상태라니 지금 민수수에게 다시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라고 판단. 접근 방식을 바꿨다.
"그럼 만드는 법이라도 좀 알려줘요. 너무 맛있어서 꼭 다시 먹어보고 싶단 말이에요."
"만드는 법? 그냥 술에 꽃을 담가두고 한달 정도 보내면 되요. 오제, 나 잠깐 어디좀 다녀올테니 나중에 봐요."
"아, 형수님, 잠깐만!"
백옥당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민수수는 휑하니 사라져버렸다.
'음, 그래. 술에 꽃을 넣고 한달이란 말이지. 한달.'
"아니, 막내도련님. 느닷없이 꽃을 따오라니 망령이라도 들었수?"
함공도 사람들은 노방에게 여러모로 고마워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 막내인 백옥당은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다. 생각해보라. 철없이 집의 재산이나 축내는 부잣집 도련님은 본래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절대 곱게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지금도 노방의 하인에게 타박을 받고 있었다.
"맛있는 술을 담그려고 그런다니까. 형수님께 다시 해달라고 할 분위기는 아니어서 그래. 난 술을 준비할테니까 넌 어디 적당한 데 가서 향긋한 꽃을 많이 꺾어오기만 하면 돼. 되면 너한테도 나눠줄게."
"나도 나름대로 살아가느라 바쁜 사람인데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하우?"
"너한테도 나눠준다니까. 이번 일 도와주면 그 은혜는 잊지 않을게."
"알았수알았수. 참 별것도 아닌 것 같고 사람 귀찮게 구시네."
부잣집 도련님으로 사는 데에도 나름의 애로사항이 있는 법이다.
백옥당은 술을 구하러 모처럼 시장으로 나섰다. 함공도의 시장은 개봉의 시장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있을 것은 다 있는 곳이었다. 오히려 사람수가 적다보니 이 곳 사람들이 필요할만한, 그리고 좋아할만한 물건들만 적절하게 가져다놓아 의외로 성공적으로 시장이 잘 정착한 형태였다.
오늘 백옥당이 갈 곳은 흰 옷을 지어주는 옷집도, 검을 수리하기 위한 대장간도 아니었다. 백옥당은 본래 민수수가 갖다놓은 술을 편안하게 마시기만 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순전히 민수수가 술을 잘 고르기 때문이었다. 헌데 이번만큼은 민수수의 도움없이, 술을 사는 것도 아니고 만들 셈이었으니 백옥당으로서는 어지간히 큰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술을 파는 곳에 들어가자, 주인은 친절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백옥당을 맞아들였다.
"어서오십시오! 어떤 술을 찾으십니까?"
그러고보니 백옥당은 화주를 만들 때 어떤 술을 써야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에이, 뭐 어떻겠어? 아무거나 써도 되겠지.'
"아, 그냥 마시려는 게 아니어서… 적당히 요즘 잘나가는 술 있으면 하나 주시오."
주인은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손 옆에 닿는 술독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홍주를 드셔보셨습니까? 향이 좋아 많은 분들이 찾는 술입니다."
백옥당은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손을 집어넣어 돈을 꺼내며 말했다.
"음, 좋소. 그거 하나 주시오."
별 생각없이 소홍주를 하나 사서 두 손으로 받쳐 들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까의 하인은 어디선가 가을 향내가 물씬 나는 국화꽃을 잔뜩 꺾어 백옥당의 방에 넣어두었다. 덕분에 백옥당의 방에서 소박한 향기가 떠나지를 않았다.
'좋아, 되든 안되든 일단 한번 해보자. 형수님 만큼은 아니어도 왠만큼은 할 수 있겠지.'
백옥당은 마당으로 나가서 조그만 장독 하나를 가져온 다음, 시장거리에서 사온 소홍주를 전부 붓고, 그 위에 꽃을 전부 쓸어넣었다. 꽃이 좀 많은 감이 있다 싶었지만 한신의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바람에 그냥 뚜껑을 덮어 땅 속에 묻어두었다. 뿌듯하게 뒤로 돌아서는데, 갑자기 전조가 생각났다.
'편지라도 보내볼까? 마침 이형이 개봉에 가겠다고 했으니…'
흥분된 마음에 간단하게 편지를 쓰고 전조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한장에게 부탁했다. 한장은 어차피 개봉에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했기 때문에 편지를 먼저 전해주고 친구를 만나겠다며 쾌히 승낙했다.
문제라면, 약속을 어길 줄 모르는 한장의 성격이었다. 포증이 그즈음 시찰을 나가버릴줄 누가 알았으랴. 결국 개봉까지 갔다가 지그재그로 전조일행을 추적했다가 다시 개봉으로 가면서 마음속으로 백옥당을 밟고 또 밟았다.
"전대인, 편지 왔습니다."
"편지?"
"네, 철지서 한 대협이 전하고 곧 돌아갔다더군요."
조호가 다가와 노란 봉투 하나를 건넨다. 전조가 주위의 분위기를 약간 살피는 듯하자, 포증은 읽어보라고 가볍게 손짓했다. 그제서야 전조는 안에 든 하얀 종이를 살며시 꺼내들었다.
전조를 비롯한 개봉부 식구들은 황명을 받아 전국을 시찰중이었다. 한장의 입장에서는 큰 행렬이 왔다갔다하니 추적이 가능하기는 했겠지만 쉽지는 않았으리라. 함공도에서 개봉까지 왔을 것이고, 포증 일행은 지금 개봉보다는 함공도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한장이 왜 돌고돌아 여기까지 왔는지는 알만한 일이었다.
'분명 백옥당이 졸랐겠지.'
내막이 뻔히 보여 작게 한숨을 쉬고는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읽는 그의 눈 속에 기쁨과 당혹감이 동시에 담겨있었다.
"한 대협이 간지 얼마나 됐나?"
웃음띤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문지기에게 전하고 곧 갔다던데 한 각 정도 됐을겁니다. 그런데 편지에 뭐라고 써 있길래 그러십니까?"
호기심을 참지 못한 조호였다. 포증의 옆에 있던 공손책이 조호에게 말리는 듯한 눈짓을 보냈으나 조호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멀뚱거리며 전조를 바라볼 뿐이었다. 전조는 개의치 않는다는듯 조호에게 편지를 내밀며 말했다.
"한번 보겠나?"
편지는 짧아 다 읽는데는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고양이, 어전을 지키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신가?
내가 그 수고에 대한 위로의 표시로서 무려 국화주를 담갔다는 거 아니겠냐?
개봉에서 이 편지 받는대로 당장 함공도로 와라
백옥당'
편지를 다 읽은 조호는 이해가 안되는지 전조에게 물었다.
"하얀털쥐와 이러고 지내십니까?"
"글쎄, 난 백형에게 서신을 띄운 일이 별로 없으니 이러고 지낸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 같군. 뭘 보고 그리 말하는가?"
"전체적으로 비웃는 내용이 아닙니까? 게다가 완전히 명령조고요."
"음, 그런건 하도 자주 겪어본 일이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 물론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없는건 아니네만."
"어디가 이상하십니까?"
"여기 이 부분. 국화주라는 걸 담갔다는 거 말일세. 전혀 백형답지 않은 행동이야. 누군가의 계교가 아닐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하지만 한 대협이 그런 계략에 기꺼이 이용당하실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한 대협이 간지 얼마나 되었냐고 물은걸세. 함공도 오의는 유명하니 다른 사람이 사칭했을지도 모르잖나. 개봉부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여기 문지기가 한 대협을 정확히 알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네. 하지만 한 각이나 되었다니 진짜라면 따라잡기 힘들거고, 가짜라면 누군지 모르니 더 찾기 힘들겠지. 그리고 정말 한 대협이라면 분명 함공도에서 개봉부까지, 그리고 개봉부에서 여기까지 우리를 추적했을텐데 그 먼 길을 오면서 왜 내게 직접 서신을 전하지 않고 문지기에게 부탁했는지도 의문이군."
그야 여기까지 오는 데 지쳐서 전조를 만날 생각을 잊은 탓일뿐, 계교따위는 없었다. 그저 백옥당을 향해 이를 득득 가는 것, 그리고 이만큼이나 왔는데 또 개봉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만이 한장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편지의 필적은 어떻습니까? 필적은 알아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필적은 백형의 것이 맞네. 그렇다고는 해도 백형이 술을 담갔다는 사실은 내가 직접 보기 전에는 믿기가 어렵군."
가만히 앉아있던 포증이 전조에게 한 마디를 건넨다.
"어디, 내가 편지를 봐도 되겠나?"
"아, 네. 물론입니다."
전조의 말이 떨어지자 조호는 포증에게 백옥당의 편지를, 전조에게는 말을 건넸다.
"마침 함공도가 멀지 않으니 한번 다녀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여기는 개봉부도 아니고 나 역시 황명을 수행중인데 사적인 일로 내 어찌 자리를 비우겠나?"
전조다운 답이었고, 또 그래야만 했지만, 포증은 백옥당의 계교 아닌 계교에 넘어가고 만다.
"다녀오게. 만약 자네 말처럼 이 일이 누군가의 책략에 의한 거라면 그걸 해결하는 일 역시 이번 시찰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로 볼 수 있네."
공손책이 얼른 끼어들어 말했다.
"대인, 하지만 전호위는 대인의 신변을 지키는 데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전호위 말대로 여기는 개봉이 아니니 안심할 수 없습니다."
"허나, 나는 개봉에 있을 때도 수차례 자객들을 맞았소. 특별히 다른 곳에 나와있다고 달라질 것은 없소. 오히려 정적들이 여기까지 자객을 보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설령 보낸다고 해도 네 명의 호법들이 있으니 걱정되는 바는 없소."
포증이 직접 이렇게까지 말하자 공손책도 더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전호위. 함공도로 가되, 오의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거라면 서신을 띄우고, 그렇지 않다면 가급적 빨리 돌아와주게."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한편 함공도에 도착한 전조. 말을 달리고 배를 타니 하루가 채 못걸려 함공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마침 도착한 배를 정리하려고 한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전조는 정말 누군가의 음모인지, 아니면 정말 직접 보낸 편지인지 확인도 할 겸 할아버지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여기 백대협이 있습니까?"
"아, 막내도련님을 찾으시우? 저쪽에 계시니 가보시우."
"네, 그럼."
그렇다면 적어도 누군가의 계략은 아니겠구나 하고 안심한 사이, 놀라운 소식이 흘러들었다.
"그런데 조심하시우. 요즘 막내도련님이 제정신이 아니거든."
"네?"
"왜 그러는지 매일같이 땅에 엎드려 뭔가를 보고 있단 말이야. 한달쯤 전부터 그리 이상해졌다우. 멀쩡하던 사람이 그리 되다니 거 참…"
"백형이 미쳤다는 말씀이십니까? 어떻게 그런!"
"그러게 말이우. 좋은 규수 만나 오래오래 잘 살 것 같았는데 어찌 그리되었는지 모를 일이우."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계교가 아니구나, 누군가의 함정에 빠진 위태로운 상황은 아니구나, 하고 마음을 놓았는데 미쳐버렸다니. 대체 어떻게 된걸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중 하나가 미쳐버렸단다. 전조는 침착할 줄을 알았지만, 워낙 이상스런 편지를 받은데다가 계속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말이 틀릴지 모른다는 계산은 미처 하지를 못했다. 그저 걱정, 걱정, 또 걱정을 할 뿐.
일단 함공도까지 왔으니 확인은 해야했다. 만약 전조가 조금만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면 노방이나 한장, 서경과 장평 등을 찾아볼 생각을 했겠지만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치지를 못했다. 그저 마음 속으로 저 할아버지가 뭔가 잘못 알고 말한 것이기를 빌고 또 빌면서 백옥당의 집까지 갔다. 백옥당이 미친 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확실히 할아버지가 말한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예의 흰 옷을 입은 채로. 전조는 너무 놀라 일단 목에서 나오는대로 말했다. 당연히 당황한 목소리는 전혀 숨기지 못했다.
"백…형, 지금 뭐하는 거요?"
"아, 고양이. 마침 잘 왔다. 잠깐 내 방에 들어가 있어. 금방 맛있는 술을 대령할테니까."
"대체 뭘 하는거요? 바닥에 뭐가 있길래…"
"자자, 넌 오늘 내가 담근 술을 처음 시식할 귀한 손님이니까 어서 들어가 있어."
그리고 백옥당은 땅에서 일어나 등을 떠밀었다. 어딘지 모르게 백옥당의 말을 들어줘야만 할 것 같아서 전조는 우선 방에 들어갔다. 기다리는 내내 마음속에 불안감이 남아있었던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백옥당이 곧 커다란 항아리를 들고 들어오더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하고는 또 간단한 안주거리와 술잔을 들고 왔다.
"이것들을 내게 주려고 나를 여기까지 부른거였소?"
"그래. 꽃으로 술을 담그면 그 맛이 기막히다고 하더라고. 세상에 그런 술이 또 없더라니까. 이건 내가 한 거라 잘 익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내 너한테도 한번 이 천상의 맛을 볼 기회를 주려고 친히 여기까지 불렀다는 거 아니냐?"
술병에서 술을 한 잔 따르더니 전조에게 내밀었다. 어쨌든 할아버지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게 너무 다행스러워 기쁘게 술잔을 받아들었다. 백옥당은 옷에 잔뜩 묻은 흙을 털어내지도 않은채 친구에게 좋은 술을 대접할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자, 마셔봐. 이거 정말 최고라니까."
술잔을 받아든 전조는 잔 속을 한번 들여다보았다. 누런듯 하얀듯 분간하기 어려운 색깔에 미묘하게 꽃 향기가 배어있는가 싶었지만 뭔가 술같지 않은 독한 냄새가 함께 코를 찔렀다.
만약 오랫동안 믿었던 친구가 권하는 게 아니었다면, 미쳤다는 말 한마디에 흔들렸던 자신이 원망스럽지 않았더라면, 전조는 술잔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조는 백옥당이 주었다는 점 때문에 의심을 떨쳐내고 술을 호쾌하게 입에 털어넣었다.
하지만, 그 때부터 전조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백형, 이런거였소? 나에게 처음 주겠다고 했던 게… 독약이었소?"
"응? 무슨 말이야? 내가 너한테 왜 독약을 줘?"
"맛으로 독을 구분하는 법은 어느정도 알고 있소. 백형이 나를 여기까지 불러들여 이걸 먹인 걸 보면 필시 나를… 정말 죽이려는 의도겠지. 포대인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나, 내 믿음에 대한 대가가 이런 것이라 해도 후회는 없소. 내가 죽어 백형이 이룰 게 있다면 그걸로 충분…"
"야, 고양이. 정신차려! 이건 독 같은 게 아니라니까. 얘가 실성을 했나. 왜 이래?"
'백형, 미쳤다는 말이 정말 사실이었소?'
이 말은 차마 내뱉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백옥당은 너무 놀라 한동안 몸이 굳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은 백옥당은 술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원래는 전조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직접 술 한잔을 따라 입에 조금만 넣고 맛을 보았다.
'아냐. 이건 삼형과 마신 술보다 맛은 훨씬 없지만 독은 아냐. 그런데 고양이는 왜?'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진 전조를 급한대로 백옥당의 침상에 옮겼다. 백옥당은 역설적이게도 누워있는 전조가 왠지 활기차보인다고 느꼈다. 하지만 전조가 앞서 했던 말처럼 정말 자신이 준 술 때문에 죽어버린다면 이건 큰일이었고, 백옥당으로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뛰쳐나갔다. 개봉부까지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니 공손책을 데려올 수도 없었고 공교롭게도 함공도에는 의원이 없었다. 멍한 상태로 마구 걷고 뛰고 하다보니 다다른 곳은 한장의 방이었다. 한장은 개봉에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당연히 방은 비어있었다. 하지만 한장의 방에 오니 다른 형제들이 불현듯 떠올라 찾기 시작했다. 장평과 서경, 노방과 그의 아내 민수수까지 모두 불러 전조가 자신이 준 술을 주고 잘못되어 쓰러졌음을 알렸다. 그 소식을 들은 오의는 백옥당을 나무랄 틈도 없이 백옥당의 방으로 뛰어갔다. 민수수도 상황이 이쯤 되자 노방과의 섭섭한 감정을 앞세우지 않았다.
백옥당은 방문을 닫아두고 나왔었다. 가장 빨리 달리던 백옥당이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런데 다섯사람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전조가 함공도 오의를 뵙습니다."
뜻밖에도 전조는 멀쩡했다. 꽃술인가 뭔가를 마시고 쓰러졌다는 전조는 어느새 예의 단정한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귀신이 살아돌아온 것일까? 가장 당황했던 백옥당이 얼른 다가가서 물었다.
"전조, 너 아까까지만 해도 무슨 독약이 어쩌고…"
"아, 백형. 내게 대체 뭘 준거요? 술이라 치기에는 맛이 조화롭지 않았던 데다가, 향과 맛이 어울리지 않아 내가 독이라고 착각을 했었소. 그리고 갑자기 기운이 빠지며 쓰러졌었는데, 깨어나니 더 힘이 나는 것 같구려."
백옥당은 벙찐 표정으로 가만히 전조를 바라봤다. 난 말 그대로 술에 꽃을 담갔을 뿐인데, 뭐가 어떻게 된걸까. 그 때 갑자기 민수수가 나서서 한 마디 했다.
"오제, 전대협에게 먹인 게 뭐죠?"
"아, 여기 이겁니다. 한달쯤 전에 제가 소홍주에 국화를 담가 만들었던건데…"
"뭐라구요? 소홍주는 그냥 마시는 건 괜찮지만, 화주를 만드는건 위험해요. 아직 알려진 게 없는데다가 섣불리 꽃을 담갔다가는 사람이 죽어나가기도 하는 술이라고요. 앞으로 다시 화주를 만들 일이 있으면 괜한 사람 잡지 말고 항상 내게 먼저 물어봐요. 알았어요?"
"하지만 전조는 멀쩡하잖아요. 그러니 된 거…"
말은 습관처럼 그렇게 했지만 백옥당도 아까 전조가 했던 생각을 했다. 아무 일이 없어서 정말 다행스럽다는. 소중한 친구는 고맙게도 옆에 머무르고 있었다. 실패한 호의를 다른 방식으로 보상해줄 수 있게 되었다는 그 하나가 그렇게 감사할 일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게다가 전조는 궁지에 몰린 백옥당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도리어 기운이 도는걸요. 그러니 백형을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십시오. 하지만, 많이 마시기에는 위험한 술 같습니다. 잠깐 깊은 잠에 빠뜨려 순간적으로 힘이 나게 하는 종류의 약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자주 먹으면 중독이 된다 들었습니다. 이 술이 약은 아니겠지만 그와 비슷한 것인가 봅니다."
"그런 약이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강호 시절 친구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무기력한 사람에게는 기운을 찾아주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주면 회광을 연장시켜주는 약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중독의 위험이 크기 때문에 오래전에 사라진 약이라고요. 중독이 되면 거꾸로 기력이 쇠잔하여 며칠 안으로 죽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뒤에 있던 노방이 나와 말했다.
"어쨌든 별 일이 없어 다행이오. 오제가 큰 실수를 범했지만, 악의는 없었으니 용서하시오."
"용서라니요. 아닙니다. 도리어 힘이 나니 고마워해야지요. 다만, 여러분들이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부탁이라면…"
"대단한 건 아닙니다. 포대인이 지금 개봉부가 아닌 다른 곳에 계시기에 포대인께 오래 머물지 않고 돌아가겠다고 약조를 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육지로 나갈 수 있게 배를 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전조는 이제야 침착함을 되찾아 할 일을 떠올렸다. 오의에게 별 일이 없다면 곧 돌아가겠다고 그 약속을 기억해낸 것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찾아온 전조를 그냥 보낼 오의가 아니었다.
"오제때문에 곤욕을 치르셨는데 우리가 어찌 그냥 보내겠소? 하루만 더 머무르시면 내일 새벽에 배를 빌려드리겠소."
"하지만…"
"어차피 지금은 시간이 늦어 배를 띄우면 위험하다오. 급하다지만 오늘 밤만이라도 머물면서 우리의 사과를 받아주시오. 오제도 많이 미안해하고 있을거요."
확실히 해는 함공도의 바다 밑으로 내려앉아 갔고, 백옥당도 약간 풀이 죽어있었다. 서신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저 친우인 전조를 오랜만에 불러다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전조가 쓰러지자 이만저만 당황한 게 아니었다. 전조에게 이같은 백옥당의 마음이 조금은 보였는지 선뜻 내일 떠나겠다고 마음을 돌렸다.
민수수와 노방은 이 참에 화해를 한 모양이었다. 서경과 장평 두 사람이 되려 더 불편했는지 화해를 주선했고, 무엇보다도 아까 전조의 소식에 놀라 백옥당의 방까지 함께 뛰어갔던 일이 크게 작용했다. 부부가 화해하는 동안 백옥당과 전조는 조용히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백옥당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화주를 처음 마시게 된 버드나무 앞이었다.
왠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오랫동안 침묵이 흐르는 와중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전조였다.
"어쨌든 고맙소."
"고맙다고?"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애써줘서. 백형은 원래 음식같은걸 만드는 사람이 아니잖소."
"……"
"그리고 오해해서 미안하오. 내 끝까지 백형을 믿지 못한 것도 미안하오."
"야, 사과는 네가 아니라 내가 해야되는…"
"아니, 내가 살아있으니 백형이 사과를 받는 게 맞소."
그리고는 전조는 술을 한 잔 들이켰다. 이번 술은 국화소홍주가 아닌, 민수수가 만든 술이었다. 달 밝은 밤에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아쉬움이 어둠을 틈타 섞여들고 있었다.
■ 30제 - 8.편지
■ 인물 - 전조
■ 장소 - 시장
■ 아이템 - 꽃
■ 엔딩 - 해피엔딩
"삼형, 대체 이 술은 뭐요? 향이며 맛이며 기가 막히는 이런 술을 대체 지금까지 어디다 숨겨뒀다 이제 꺼내주는 거요?"
백옥당이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부리며 말하자 서경은 저도 모르게 흠칫 뒤로 물러났다. 당혹스러움이 잔뜩 밴 어조로 백옥당에게 답했다.
"몰…랐냐? 형수님이 한달쯤 전부터 만든 술이야. 무슨 꽃을 써서 만들었다지, 아마?"
"꽃? 꽃으로도 술을 만들 수 있다고요?"
"글쎄. 난 잘 모르니, 자세한건 형수님께 여쭤보라고."
서경은 마지막 술을 얼른 삼켜버렸다. 백옥당은 아쉬워했지만, 서경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버드나무의 늘어진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 백옥당은 서경이 딱 한 잔 나눠준 그 술에 마음을 꽉 틀어잡히고 말았다. 원래 미각에 충실한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발견하면 앞뒤 못가리고 덤벼드는 법. 당장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민수수에게 달려갔다.
"형수님, 꽃으로 술을 담그셨다면서요?"
민수수가 그릇을 닦아내면서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 대답했다.
"아, 그건 왜…?"
백옥당이 민수수 옆에 푹 소리가 날 정도로 주저앉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형수님이 담근 술맛이 기막히던데, 남은 거 있으면 조금이라도 주면 안될까 싶어서요."
"도련님, 어쩌지요? 나도 이번에 처음 담가본거라 조금밖에 안했거든요. 기껏 담갔더니만 도주님은 화주를 좋아하지 않으시더군요. 그래서 요즘 싸우고 있어요. 아내가 힘들게 한 걸 그렇게 내치다니 어떻게 그럴수가 있는지…"
사실 백옥당은 노방과 민수수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고, 지금은 관심도 없었다.
"아, 그럼 많이 남았겠네요."
"이제가 개봉으로 갈 때 가져간다며 조금 가져갔고, 삼제가 달라기에 남은 걸 다 줬으니 삼제에게 한번 가 보시지요."
백옥당은 방금 서경에게 그 술을 얻어먹고 오는 길이 아니었겠나. 간다고 한들 술 한 방울 안 나올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백옥당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백옥당이 노방의 가정사에 일순간 무심하기는 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민수수가 담근 술 때문에 노방과의 사이가 나빠진 상태라니 지금 민수수에게 다시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라고 판단. 접근 방식을 바꿨다.
"그럼 만드는 법이라도 좀 알려줘요. 너무 맛있어서 꼭 다시 먹어보고 싶단 말이에요."
"만드는 법? 그냥 술에 꽃을 담가두고 한달 정도 보내면 되요. 오제, 나 잠깐 어디좀 다녀올테니 나중에 봐요."
"아, 형수님, 잠깐만!"
백옥당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민수수는 휑하니 사라져버렸다.
'음, 그래. 술에 꽃을 넣고 한달이란 말이지. 한달.'
"아니, 막내도련님. 느닷없이 꽃을 따오라니 망령이라도 들었수?"
함공도 사람들은 노방에게 여러모로 고마워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 막내인 백옥당은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다. 생각해보라. 철없이 집의 재산이나 축내는 부잣집 도련님은 본래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절대 곱게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지금도 노방의 하인에게 타박을 받고 있었다.
"맛있는 술을 담그려고 그런다니까. 형수님께 다시 해달라고 할 분위기는 아니어서 그래. 난 술을 준비할테니까 넌 어디 적당한 데 가서 향긋한 꽃을 많이 꺾어오기만 하면 돼. 되면 너한테도 나눠줄게."
"나도 나름대로 살아가느라 바쁜 사람인데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하우?"
"너한테도 나눠준다니까. 이번 일 도와주면 그 은혜는 잊지 않을게."
"알았수알았수. 참 별것도 아닌 것 같고 사람 귀찮게 구시네."
부잣집 도련님으로 사는 데에도 나름의 애로사항이 있는 법이다.
백옥당은 술을 구하러 모처럼 시장으로 나섰다. 함공도의 시장은 개봉의 시장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있을 것은 다 있는 곳이었다. 오히려 사람수가 적다보니 이 곳 사람들이 필요할만한, 그리고 좋아할만한 물건들만 적절하게 가져다놓아 의외로 성공적으로 시장이 잘 정착한 형태였다.
오늘 백옥당이 갈 곳은 흰 옷을 지어주는 옷집도, 검을 수리하기 위한 대장간도 아니었다. 백옥당은 본래 민수수가 갖다놓은 술을 편안하게 마시기만 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순전히 민수수가 술을 잘 고르기 때문이었다. 헌데 이번만큼은 민수수의 도움없이, 술을 사는 것도 아니고 만들 셈이었으니 백옥당으로서는 어지간히 큰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술을 파는 곳에 들어가자, 주인은 친절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백옥당을 맞아들였다.
"어서오십시오! 어떤 술을 찾으십니까?"
그러고보니 백옥당은 화주를 만들 때 어떤 술을 써야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에이, 뭐 어떻겠어? 아무거나 써도 되겠지.'
"아, 그냥 마시려는 게 아니어서… 적당히 요즘 잘나가는 술 있으면 하나 주시오."
주인은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손 옆에 닿는 술독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홍주를 드셔보셨습니까? 향이 좋아 많은 분들이 찾는 술입니다."
백옥당은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손을 집어넣어 돈을 꺼내며 말했다.
"음, 좋소. 그거 하나 주시오."
별 생각없이 소홍주를 하나 사서 두 손으로 받쳐 들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까의 하인은 어디선가 가을 향내가 물씬 나는 국화꽃을 잔뜩 꺾어 백옥당의 방에 넣어두었다. 덕분에 백옥당의 방에서 소박한 향기가 떠나지를 않았다.
'좋아, 되든 안되든 일단 한번 해보자. 형수님 만큼은 아니어도 왠만큼은 할 수 있겠지.'
백옥당은 마당으로 나가서 조그만 장독 하나를 가져온 다음, 시장거리에서 사온 소홍주를 전부 붓고, 그 위에 꽃을 전부 쓸어넣었다. 꽃이 좀 많은 감이 있다 싶었지만 한신의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바람에 그냥 뚜껑을 덮어 땅 속에 묻어두었다. 뿌듯하게 뒤로 돌아서는데, 갑자기 전조가 생각났다.
'편지라도 보내볼까? 마침 이형이 개봉에 가겠다고 했으니…'
흥분된 마음에 간단하게 편지를 쓰고 전조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한장에게 부탁했다. 한장은 어차피 개봉에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했기 때문에 편지를 먼저 전해주고 친구를 만나겠다며 쾌히 승낙했다.
문제라면, 약속을 어길 줄 모르는 한장의 성격이었다. 포증이 그즈음 시찰을 나가버릴줄 누가 알았으랴. 결국 개봉까지 갔다가 지그재그로 전조일행을 추적했다가 다시 개봉으로 가면서 마음속으로 백옥당을 밟고 또 밟았다.
"전대인, 편지 왔습니다."
"편지?"
"네, 철지서 한 대협이 전하고 곧 돌아갔다더군요."
조호가 다가와 노란 봉투 하나를 건넨다. 전조가 주위의 분위기를 약간 살피는 듯하자, 포증은 읽어보라고 가볍게 손짓했다. 그제서야 전조는 안에 든 하얀 종이를 살며시 꺼내들었다.
전조를 비롯한 개봉부 식구들은 황명을 받아 전국을 시찰중이었다. 한장의 입장에서는 큰 행렬이 왔다갔다하니 추적이 가능하기는 했겠지만 쉽지는 않았으리라. 함공도에서 개봉까지 왔을 것이고, 포증 일행은 지금 개봉보다는 함공도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한장이 왜 돌고돌아 여기까지 왔는지는 알만한 일이었다.
'분명 백옥당이 졸랐겠지.'
내막이 뻔히 보여 작게 한숨을 쉬고는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읽는 그의 눈 속에 기쁨과 당혹감이 동시에 담겨있었다.
"한 대협이 간지 얼마나 됐나?"
웃음띤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문지기에게 전하고 곧 갔다던데 한 각 정도 됐을겁니다. 그런데 편지에 뭐라고 써 있길래 그러십니까?"
호기심을 참지 못한 조호였다. 포증의 옆에 있던 공손책이 조호에게 말리는 듯한 눈짓을 보냈으나 조호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멀뚱거리며 전조를 바라볼 뿐이었다. 전조는 개의치 않는다는듯 조호에게 편지를 내밀며 말했다.
"한번 보겠나?"
편지는 짧아 다 읽는데는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고양이, 어전을 지키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신가?
내가 그 수고에 대한 위로의 표시로서 무려 국화주를 담갔다는 거 아니겠냐?
개봉에서 이 편지 받는대로 당장 함공도로 와라
백옥당'
편지를 다 읽은 조호는 이해가 안되는지 전조에게 물었다.
"하얀털쥐와 이러고 지내십니까?"
"글쎄, 난 백형에게 서신을 띄운 일이 별로 없으니 이러고 지낸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 같군. 뭘 보고 그리 말하는가?"
"전체적으로 비웃는 내용이 아닙니까? 게다가 완전히 명령조고요."
"음, 그런건 하도 자주 겪어본 일이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 물론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없는건 아니네만."
"어디가 이상하십니까?"
"여기 이 부분. 국화주라는 걸 담갔다는 거 말일세. 전혀 백형답지 않은 행동이야. 누군가의 계교가 아닐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하지만 한 대협이 그런 계략에 기꺼이 이용당하실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한 대협이 간지 얼마나 되었냐고 물은걸세. 함공도 오의는 유명하니 다른 사람이 사칭했을지도 모르잖나. 개봉부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여기 문지기가 한 대협을 정확히 알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네. 하지만 한 각이나 되었다니 진짜라면 따라잡기 힘들거고, 가짜라면 누군지 모르니 더 찾기 힘들겠지. 그리고 정말 한 대협이라면 분명 함공도에서 개봉부까지, 그리고 개봉부에서 여기까지 우리를 추적했을텐데 그 먼 길을 오면서 왜 내게 직접 서신을 전하지 않고 문지기에게 부탁했는지도 의문이군."
그야 여기까지 오는 데 지쳐서 전조를 만날 생각을 잊은 탓일뿐, 계교따위는 없었다. 그저 백옥당을 향해 이를 득득 가는 것, 그리고 이만큼이나 왔는데 또 개봉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만이 한장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편지의 필적은 어떻습니까? 필적은 알아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필적은 백형의 것이 맞네. 그렇다고는 해도 백형이 술을 담갔다는 사실은 내가 직접 보기 전에는 믿기가 어렵군."
가만히 앉아있던 포증이 전조에게 한 마디를 건넨다.
"어디, 내가 편지를 봐도 되겠나?"
"아, 네. 물론입니다."
전조의 말이 떨어지자 조호는 포증에게 백옥당의 편지를, 전조에게는 말을 건넸다.
"마침 함공도가 멀지 않으니 한번 다녀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여기는 개봉부도 아니고 나 역시 황명을 수행중인데 사적인 일로 내 어찌 자리를 비우겠나?"
전조다운 답이었고, 또 그래야만 했지만, 포증은 백옥당의 계교 아닌 계교에 넘어가고 만다.
"다녀오게. 만약 자네 말처럼 이 일이 누군가의 책략에 의한 거라면 그걸 해결하는 일 역시 이번 시찰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로 볼 수 있네."
공손책이 얼른 끼어들어 말했다.
"대인, 하지만 전호위는 대인의 신변을 지키는 데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전호위 말대로 여기는 개봉이 아니니 안심할 수 없습니다."
"허나, 나는 개봉에 있을 때도 수차례 자객들을 맞았소. 특별히 다른 곳에 나와있다고 달라질 것은 없소. 오히려 정적들이 여기까지 자객을 보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설령 보낸다고 해도 네 명의 호법들이 있으니 걱정되는 바는 없소."
포증이 직접 이렇게까지 말하자 공손책도 더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전호위. 함공도로 가되, 오의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거라면 서신을 띄우고, 그렇지 않다면 가급적 빨리 돌아와주게."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한편 함공도에 도착한 전조. 말을 달리고 배를 타니 하루가 채 못걸려 함공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마침 도착한 배를 정리하려고 한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전조는 정말 누군가의 음모인지, 아니면 정말 직접 보낸 편지인지 확인도 할 겸 할아버지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여기 백대협이 있습니까?"
"아, 막내도련님을 찾으시우? 저쪽에 계시니 가보시우."
"네, 그럼."
그렇다면 적어도 누군가의 계략은 아니겠구나 하고 안심한 사이, 놀라운 소식이 흘러들었다.
"그런데 조심하시우. 요즘 막내도련님이 제정신이 아니거든."
"네?"
"왜 그러는지 매일같이 땅에 엎드려 뭔가를 보고 있단 말이야. 한달쯤 전부터 그리 이상해졌다우. 멀쩡하던 사람이 그리 되다니 거 참…"
"백형이 미쳤다는 말씀이십니까? 어떻게 그런!"
"그러게 말이우. 좋은 규수 만나 오래오래 잘 살 것 같았는데 어찌 그리되었는지 모를 일이우."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계교가 아니구나, 누군가의 함정에 빠진 위태로운 상황은 아니구나, 하고 마음을 놓았는데 미쳐버렸다니. 대체 어떻게 된걸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중 하나가 미쳐버렸단다. 전조는 침착할 줄을 알았지만, 워낙 이상스런 편지를 받은데다가 계속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말이 틀릴지 모른다는 계산은 미처 하지를 못했다. 그저 걱정, 걱정, 또 걱정을 할 뿐.
일단 함공도까지 왔으니 확인은 해야했다. 만약 전조가 조금만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면 노방이나 한장, 서경과 장평 등을 찾아볼 생각을 했겠지만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치지를 못했다. 그저 마음 속으로 저 할아버지가 뭔가 잘못 알고 말한 것이기를 빌고 또 빌면서 백옥당의 집까지 갔다. 백옥당이 미친 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확실히 할아버지가 말한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예의 흰 옷을 입은 채로. 전조는 너무 놀라 일단 목에서 나오는대로 말했다. 당연히 당황한 목소리는 전혀 숨기지 못했다.
"백…형, 지금 뭐하는 거요?"
"아, 고양이. 마침 잘 왔다. 잠깐 내 방에 들어가 있어. 금방 맛있는 술을 대령할테니까."
"대체 뭘 하는거요? 바닥에 뭐가 있길래…"
"자자, 넌 오늘 내가 담근 술을 처음 시식할 귀한 손님이니까 어서 들어가 있어."
그리고 백옥당은 땅에서 일어나 등을 떠밀었다. 어딘지 모르게 백옥당의 말을 들어줘야만 할 것 같아서 전조는 우선 방에 들어갔다. 기다리는 내내 마음속에 불안감이 남아있었던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백옥당이 곧 커다란 항아리를 들고 들어오더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하고는 또 간단한 안주거리와 술잔을 들고 왔다.
"이것들을 내게 주려고 나를 여기까지 부른거였소?"
"그래. 꽃으로 술을 담그면 그 맛이 기막히다고 하더라고. 세상에 그런 술이 또 없더라니까. 이건 내가 한 거라 잘 익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내 너한테도 한번 이 천상의 맛을 볼 기회를 주려고 친히 여기까지 불렀다는 거 아니냐?"
술병에서 술을 한 잔 따르더니 전조에게 내밀었다. 어쨌든 할아버지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게 너무 다행스러워 기쁘게 술잔을 받아들었다. 백옥당은 옷에 잔뜩 묻은 흙을 털어내지도 않은채 친구에게 좋은 술을 대접할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자, 마셔봐. 이거 정말 최고라니까."
술잔을 받아든 전조는 잔 속을 한번 들여다보았다. 누런듯 하얀듯 분간하기 어려운 색깔에 미묘하게 꽃 향기가 배어있는가 싶었지만 뭔가 술같지 않은 독한 냄새가 함께 코를 찔렀다.
만약 오랫동안 믿었던 친구가 권하는 게 아니었다면, 미쳤다는 말 한마디에 흔들렸던 자신이 원망스럽지 않았더라면, 전조는 술잔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조는 백옥당이 주었다는 점 때문에 의심을 떨쳐내고 술을 호쾌하게 입에 털어넣었다.
하지만, 그 때부터 전조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백형, 이런거였소? 나에게 처음 주겠다고 했던 게… 독약이었소?"
"응? 무슨 말이야? 내가 너한테 왜 독약을 줘?"
"맛으로 독을 구분하는 법은 어느정도 알고 있소. 백형이 나를 여기까지 불러들여 이걸 먹인 걸 보면 필시 나를… 정말 죽이려는 의도겠지. 포대인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나, 내 믿음에 대한 대가가 이런 것이라 해도 후회는 없소. 내가 죽어 백형이 이룰 게 있다면 그걸로 충분…"
"야, 고양이. 정신차려! 이건 독 같은 게 아니라니까. 얘가 실성을 했나. 왜 이래?"
'백형, 미쳤다는 말이 정말 사실이었소?'
이 말은 차마 내뱉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백옥당은 너무 놀라 한동안 몸이 굳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은 백옥당은 술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원래는 전조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직접 술 한잔을 따라 입에 조금만 넣고 맛을 보았다.
'아냐. 이건 삼형과 마신 술보다 맛은 훨씬 없지만 독은 아냐. 그런데 고양이는 왜?'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진 전조를 급한대로 백옥당의 침상에 옮겼다. 백옥당은 역설적이게도 누워있는 전조가 왠지 활기차보인다고 느꼈다. 하지만 전조가 앞서 했던 말처럼 정말 자신이 준 술 때문에 죽어버린다면 이건 큰일이었고, 백옥당으로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뛰쳐나갔다. 개봉부까지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니 공손책을 데려올 수도 없었고 공교롭게도 함공도에는 의원이 없었다. 멍한 상태로 마구 걷고 뛰고 하다보니 다다른 곳은 한장의 방이었다. 한장은 개봉에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당연히 방은 비어있었다. 하지만 한장의 방에 오니 다른 형제들이 불현듯 떠올라 찾기 시작했다. 장평과 서경, 노방과 그의 아내 민수수까지 모두 불러 전조가 자신이 준 술을 주고 잘못되어 쓰러졌음을 알렸다. 그 소식을 들은 오의는 백옥당을 나무랄 틈도 없이 백옥당의 방으로 뛰어갔다. 민수수도 상황이 이쯤 되자 노방과의 섭섭한 감정을 앞세우지 않았다.
백옥당은 방문을 닫아두고 나왔었다. 가장 빨리 달리던 백옥당이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런데 다섯사람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전조가 함공도 오의를 뵙습니다."
뜻밖에도 전조는 멀쩡했다. 꽃술인가 뭔가를 마시고 쓰러졌다는 전조는 어느새 예의 단정한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귀신이 살아돌아온 것일까? 가장 당황했던 백옥당이 얼른 다가가서 물었다.
"전조, 너 아까까지만 해도 무슨 독약이 어쩌고…"
"아, 백형. 내게 대체 뭘 준거요? 술이라 치기에는 맛이 조화롭지 않았던 데다가, 향과 맛이 어울리지 않아 내가 독이라고 착각을 했었소. 그리고 갑자기 기운이 빠지며 쓰러졌었는데, 깨어나니 더 힘이 나는 것 같구려."
백옥당은 벙찐 표정으로 가만히 전조를 바라봤다. 난 말 그대로 술에 꽃을 담갔을 뿐인데, 뭐가 어떻게 된걸까. 그 때 갑자기 민수수가 나서서 한 마디 했다.
"오제, 전대협에게 먹인 게 뭐죠?"
"아, 여기 이겁니다. 한달쯤 전에 제가 소홍주에 국화를 담가 만들었던건데…"
"뭐라구요? 소홍주는 그냥 마시는 건 괜찮지만, 화주를 만드는건 위험해요. 아직 알려진 게 없는데다가 섣불리 꽃을 담갔다가는 사람이 죽어나가기도 하는 술이라고요. 앞으로 다시 화주를 만들 일이 있으면 괜한 사람 잡지 말고 항상 내게 먼저 물어봐요. 알았어요?"
"하지만 전조는 멀쩡하잖아요. 그러니 된 거…"
말은 습관처럼 그렇게 했지만 백옥당도 아까 전조가 했던 생각을 했다. 아무 일이 없어서 정말 다행스럽다는. 소중한 친구는 고맙게도 옆에 머무르고 있었다. 실패한 호의를 다른 방식으로 보상해줄 수 있게 되었다는 그 하나가 그렇게 감사할 일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게다가 전조는 궁지에 몰린 백옥당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도리어 기운이 도는걸요. 그러니 백형을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십시오. 하지만, 많이 마시기에는 위험한 술 같습니다. 잠깐 깊은 잠에 빠뜨려 순간적으로 힘이 나게 하는 종류의 약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자주 먹으면 중독이 된다 들었습니다. 이 술이 약은 아니겠지만 그와 비슷한 것인가 봅니다."
"그런 약이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강호 시절 친구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무기력한 사람에게는 기운을 찾아주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주면 회광을 연장시켜주는 약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중독의 위험이 크기 때문에 오래전에 사라진 약이라고요. 중독이 되면 거꾸로 기력이 쇠잔하여 며칠 안으로 죽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뒤에 있던 노방이 나와 말했다.
"어쨌든 별 일이 없어 다행이오. 오제가 큰 실수를 범했지만, 악의는 없었으니 용서하시오."
"용서라니요. 아닙니다. 도리어 힘이 나니 고마워해야지요. 다만, 여러분들이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부탁이라면…"
"대단한 건 아닙니다. 포대인이 지금 개봉부가 아닌 다른 곳에 계시기에 포대인께 오래 머물지 않고 돌아가겠다고 약조를 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육지로 나갈 수 있게 배를 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전조는 이제야 침착함을 되찾아 할 일을 떠올렸다. 오의에게 별 일이 없다면 곧 돌아가겠다고 그 약속을 기억해낸 것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찾아온 전조를 그냥 보낼 오의가 아니었다.
"오제때문에 곤욕을 치르셨는데 우리가 어찌 그냥 보내겠소? 하루만 더 머무르시면 내일 새벽에 배를 빌려드리겠소."
"하지만…"
"어차피 지금은 시간이 늦어 배를 띄우면 위험하다오. 급하다지만 오늘 밤만이라도 머물면서 우리의 사과를 받아주시오. 오제도 많이 미안해하고 있을거요."
확실히 해는 함공도의 바다 밑으로 내려앉아 갔고, 백옥당도 약간 풀이 죽어있었다. 서신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저 친우인 전조를 오랜만에 불러다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전조가 쓰러지자 이만저만 당황한 게 아니었다. 전조에게 이같은 백옥당의 마음이 조금은 보였는지 선뜻 내일 떠나겠다고 마음을 돌렸다.
민수수와 노방은 이 참에 화해를 한 모양이었다. 서경과 장평 두 사람이 되려 더 불편했는지 화해를 주선했고, 무엇보다도 아까 전조의 소식에 놀라 백옥당의 방까지 함께 뛰어갔던 일이 크게 작용했다. 부부가 화해하는 동안 백옥당과 전조는 조용히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백옥당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화주를 처음 마시게 된 버드나무 앞이었다.
왠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오랫동안 침묵이 흐르는 와중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전조였다.
"어쨌든 고맙소."
"고맙다고?"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애써줘서. 백형은 원래 음식같은걸 만드는 사람이 아니잖소."
"……"
"그리고 오해해서 미안하오. 내 끝까지 백형을 믿지 못한 것도 미안하오."
"야, 사과는 네가 아니라 내가 해야되는…"
"아니, 내가 살아있으니 백형이 사과를 받는 게 맞소."
그리고는 전조는 술을 한 잔 들이켰다. 이번 술은 국화소홍주가 아닌, 민수수가 만든 술이었다. 달 밝은 밤에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아쉬움이 어둠을 틈타 섞여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