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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 project/SLAYERS

오랜만에 다시 본 슬레이어즈

한때 좋아했지만 다시 빠지랴 싶었는데 10년가까이 지났는데도 앉은자리에서 TRY 26화 전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야 말았다. 특히 마지막 두 편에서는 말 그대로 숨이 막혔다. 숨을 쉬는 것조차 방해가 된다고 생각될 정도였으니까.

비교적 최근까지 좋아했던 봉신연의나 데스노트같은 작품과는 색깔이 다르다.  데스노트의 경우 작가가 데스노트의 룰을 매화마다 적을 때 이전에 적은 룰과 모순이 없는지를 계속 확인해야했다고 밝혔고 스토리라인 자체가 이미 단 한 곳만 어그러지면 주인공이 위험해진다. 봉신연의도 다소 비슷한 성향이지만 이쪽에는 아예 실수가 있어서 곤륜산2의 직경이 3m가 되어버렸다.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칼날위에 올라선듯 계산되어 꽉 짜여진 느낌이다. 물론 이 두 작품 모두 이런 부분이 매력이기도 하다.

슬레이어즈는 기본적으로 그런 부담이 없다. 매우 치밀하지만 언뜻 보기에는 빈틈이 많아보이고, 치밀한 부분이 스토리를 따라가면서는 보이지 않는다. 여행하는 그들이 음식찬양론을 늘어놓고 있는 모습을 그저 즐기며 바라봐주면 어느새 자연스럽게 결론에 도달해 있다. 또한 이들의 목표는 세계평화나 정의구현같은 거창한 것도, 이야기 소재로서는 이미 식상해진 사랑같은 것도 아니다. 주인공 일행은 언제나 생존과 하루하루의 삶 자체에 목표를 둔다. 다음 스토리의 진행이 어떻게 되는지보다 당장 다음 장면이 궁금하기 때문에 이 점이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흡인력으로서 작용한다.

이야기자체의 복잡함과는 별개로 슬레이어즈에는 모사나 지략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결정은 이야기의 전체 흐름을 놓고 보면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넥스트의 가브와 리나일행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감정적인 충돌로 치닫지 않았으면 좀 더 좋은 방법으로 일이 풀릴 수도 있었다. 트라이에서 엘로고스와의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있었고, 특히 제로스가 어차피 이 세계를 구할 생각이었다면 바르가브의 일과 상관없이 리나일행에게 처음부터 협력을 구해 일을 쉽게 풀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데 도움을 줬다는 점에서 달리 할 말이 없다.

사둔 OST에서 음악 추출하고 소설을 사 읽어볼까 싶다.
중학교 때 같은반 학생 중 하나가 읽는 걸 보긴 했는데 차마 빌려달란 소리가 안 나왔던 그 책.


신기하게도 제로스는 단 한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건 비밀이라며 대답을 회피하거나, 알려주고 싶지 않은 내용에 대해 아예 정보제공을 하지 않는 경우는 있었지만. 사실은 A인 것을 B라고 말한 일은 없었다.
악역임이 분명한데도 인기가 많다. 이성적으로는 미워해야할 부분이 많은데 감정적으로는 그게 안된달까.
우울, 슬픔, 분노와 같은 마이너스 에너지에서 힘을 얻는 마족 제로스가 플러스 에너지 95% 이상의 리나 일행과 어울려다니고도 멀쩡한 부분에 있어서는 경의를 표한다.
여담으로 제로스와 바르가브의 전투장면은 잔인한 제로스 덕분인지 SBS판으로는 약간 가위질이 있었던듯 하다.

바르가브는 복수가 삶의 목표였다. 지라스는 그와 그라보스를 구해준 것을 이유로 바르가브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실제로 바르가브는 유적에서 그라보스에게 괴물의 봉인을 풀게 만들고는 그를 지하에 버려두고 혼자 자리를 피해버렸다. 불필요한 살생이나 폭력은 없었지만, 복수를 위해 필요한 것, 편리한 것에 대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다만 피리아가, 그가 슬픈 눈을 하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복수니 정화니 하는 것들을 원치 않았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가 정말 파괴와 정화를 원했다면 다크스타를 흡수해(다크스타가 흡수해서?) 다시 나타났을 때 다섯개의 무기를 쓰지 못하도록 그들을 최우선으로 죽이거나, 적어도 무기를 빼앗았어야 했다. 그러나 몇 차례 말을 하려고 다른 공간에 그들을 데려갔을 뿐, 세상을 파괴(정화?)하는데 주력했고 사실상 자신을 공격하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었다. 마지막 공격을 받은 그는 짐을 다 벗어던진 모습이었다. 볼피드와 다크스타와 함께 있으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바르가브가 정신공격을(특히 제로스에게) 했다고 하지만 그 때 바르가브는 이미 이들 모두를 압도하고도 남을 힘이 있었다. 그는 진심을 말했던 것이다.

슬레이어즈 오리지널과는 달리 넥스트부터 갑자기 질문이 늘어난 가우리의 희생이 고맙고 또 아쉽다. 그저 뛰어나고 순수한 검사로 남았어도 좋을텐데 순전히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희생된 가우리.

아무래도 아멜리아가 제르가디스를 좋아하는 것처럼 제르가디스가 아멜리아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넥스트에서 가브가 아멜리아를 공격할 때 제르가디스가 몸으로 대신 맞아준 적은 있지만 동료로서 도와준 데 더 가까워보이고(SBS에서는 이 부분도 잘렸다. 제르가디스가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런듯), 트라이에서 아멜리아가 제르가디스를 좋아하는듯한 말을 한두 번 하는 게 전부이다. 마지막 싸움 때 아멜리아가 제르가디스에게 싸움이 끝난 후 세일룬에 와달라고 부탁하지만 에필로그를 보면 결국 아멜리아의 어뮬렛만 받고 몸을 되돌리기 위한 여행만 계속 한 것 같고…. (개인적으로는 굳이 슬레이어즈의 캐릭터들을 커플로 몰아갈 필요도 없다고 본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이 정도 거리가 적절해보인다.)

리나의 마법주문은 레벨차이가 꽤 큰 느낌이다. 마을 하나가 날아가는 주문도 안통하는 상대가 의외로 많고 라그나 블레이드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그보다 상위마법인 기가 슬레이브를 쓰면 세상이 날아간다. (아니, 사실 가우리, 제르가디스, 아멜리아가 약한건 아닌데…)
게다가 자기 편한대로 사는 것으로는 최고. 이는 자기중심적인 것과는 또 다르다.

피리아의 대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건 썩은쓰레기 [...]
SBS판에서 피리아에게 했던 지라스의 대사가 매우 순화된 것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지라스는 수인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서 어째서 수왕에게 가지 않았… 왜 파르에게 돌아가지 않고 도자기가게에서 일하는 걸까?

그렇게 열심히 봤는데도 정글스는 등장하기 전까지 존재를 아예 잊고 있었다. 마르티나와 함께 행복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