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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 project/包靑天

<단편> 저승에 간 백옥당

"잠깐, 그런데 대체 왜…"

전조도 뭔가 위험을 느껴 거궐을 뽑아들고 싸우기 시작했다. 문제라면 전조 자신은 싸움의 이유를 전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싸우는 상대가 백옥당이라는 것이었다. 그나마 한적한 산길이었기에 망정이지, 사람많은 개봉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백옥당은 무섭게 덤벼들었고, 전조는 검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공격을 막을 뿐이었다.

"시끄러워. 너만 없으면 난 천하제일검이 될 수 있단 말이다!"

그래. 언제 싸움거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이유없는 싸움같아 귀찮기는 했지만 이미 이 싸움을 피할지 피하지 않을지 결정할 상황은 지나 있었다. 두 사람이 싸우는 곳은 좁은 낭떠러지같은 길이라 도망쳐보려고 해도 쉽지 않았고, 싸움을 끝내려면 백옥당이 공격을 멈추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서운 공격은 계속 이어졌고, 백옥당은 지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백옥당은 전조를 멀리 밀어내고 막 마지막 공격을 가하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 때, 절벽 위에서 커다란 바위가 미끄러져 내려왔다. 전조는 저 멀리에서 다시 검을 잡고 일어났는데, 전조를 향해 달려오던 백옥당은 바위에 깔리고 말았다. 백옥당을 쓰러뜨린 바위는 그대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고, 백옥당의 몸은 그대로 누워 일어날 줄을 몰랐다. 곧 저승사자가 나타났고, 백옥당의 영혼을 저승으로 이끌었다.





저승에 간 백옥당은 진기한 풍경을 보았다. 왠 사람들이 호화로운 마차를 하나씩 타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이었다. 금빛 마차는 보기에도 아름다웠는데, 그 곳은 볼 수는 있어도 막아놓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쪽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마차를 향해 가는 것이 보이자 백옥당도 그 쪽으로 가서 줄을 섰다.

그 줄의 맨 앞에는 저승사자가 또 있었는데, 줄을 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사람들을 마차로 보내주는듯 했다. 줄이라고는 하지만 백옥당의 순서가 그리 늦지 않아서 앞에 자리한 사람들이 저승사자와 나누는 대화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이령? 산을 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서 죽었군."

저승사자의 앞에 선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저승사자는 지나가라고 손짓했다.

"정원교? 천연두에 걸려서 죽었군."

저승사자의 앞에 선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저승사자는 역시 지나가라고 손짓했다.

"조진? 말발굽에 치여 죽었군."

저승사자의 앞에 선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저승사자는 이번에도 지나가라고 손짓했다.

그 다음은 왠 어린아이들 셋이 다가왔다. 해맑게 웃으며 저승사자 앞을 지나가자 저승사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혀를 차며 불쌍하다는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틈에 백옥당은 저승사자를 지나 몰래 지나가려고 숨을 죽이며 조용히 걸어갔다.

"기다리게, 백옥당."

저승사자는 두꺼운 책을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백옥당에 해당하는 부분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백옥당이 저승사자의 얼굴을 봤는데 너무도 익숙한 얼굴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포, 포대인?"
"평생동안 죄없는 고양이를 괴롭혔군."

포대인과 너무도 똑같은 얼굴을 한 저승사자가 말했다. 개봉부의 법정은 아니었지만, 그 얼굴에서 이미 엄청난 위압감을 내보이고 있었다. 저승사자는 말을 이었다.

"자네 기록으로는 저 마차에 태워줄 수가 없군. 하지만 저 마차가 떠나려면 한 시진이 남아있네. 그러니 그 동안 그 고양이에게, 용서한다는 서명을 받아오게."

그렇게 말하면서 '모든 걸 용서한다'고 적혀 서명만을 기다리는 종이 한 장을 백옥당에게 건넸다. 고양이라면 전조를 말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동물 고양이를 괴롭힌 적은 없으니 전조에게 생각이 미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포대인이 저승사자라는건 전조가 당한 걸 대신 보복이라도 하겠다는 의미로 여겨졌다.

"만약 자네가 그 고양이의 서명을 받아오지 못하면,"

한층 진지해진 포대인, 아니 저승사자의 어투에 백옥당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저승사자는 자신의 뒤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된다네."

그 그림에는 불구덩이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그려져있었다. 너무 끔찍해서 백옥당이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 저승사자의 말이 한번 더 떨어졌다.

"이제 한 시진 남았네."




백옥당은 아까의 낭떠러지같은 길에서 다시 깨어났다. 너무도 끔찍한 꿈에 가볍게 이마의 땀을 훔쳤는데, 손에는 저승사자가 준 종이가 그대로 들려있는 것이 아닌가. 백옥당은 깜짝 놀라 전조를 찾았지만, 주변에는 보이지 않았다. 전조를 저 멀리 밀어냈던 게 떠올라 길을 따라가봤더니 아니나다를까 전조가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있었다.

"야, 고양이."

전조가 얼른 이쪽을 바라보는 품이 저승사자가 말한 고양이가 전조가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뭐 그렇다면 전조한테 그 서명을 받으면 된다는걸까? 시간은 계속 지나갔고, 불구덩이는 여전히 무서웠다.

"저… 저기, 이거."

백옥당이 수줍게 저승사자가 준 종이와, 산 속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필묵을 내밀었다. 전조는 뚱한 표정으로 종이만 일단 받아들었다.

"뭐요, 이게."

'모든 걸 용서한다.'라니. 그런데 그 필적은 아무리 봐도 포대인의 그것과 같았다. 조금 수상쩍기는 했으나 전조는 이 모든 일을 백옥당의 장난으로 결론짓고 종이를 도로 백옥당에게 넘겼다.

"갑자기 무슨소리요? 싸울 일 없으면 이제 내려갑시다."

하면서, 전조는 몸을 홱 돌려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백옥당과 맞붙어 싸운 곳이 가장 험한 길이었다. 말 그대로 위험천만한 곳. 그런 곳에서 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여 자신을 공격한 것 부터가, 아까 백옥당이 준 글을 본따자면 별로 용서할 생각이 없는 일이었다.

전조가 장난처럼 받아넘기는 이 문제가 백옥당에게는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갈림길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백옥당은 다시 검을 뽑아들어 전조에게 겨누었다.

"야, 이거 해달라니…"

그 순간, 백옥당의 머리를 확 스치고 지나간 것은 아까 포대인이 보여준 불구덩이 그림이었다. 전조는 백옥당의 말에 뒤에서 얌전히 따라온다고 생각했던 백옥당을 돌아보았는데, 백옥당이 칼을 들고 있었다.

"아, 내려가자. 일단 내려가보자. 하하하."
"그럽…시다."




얼마나 걸었을까. 백옥당은 그동안 별 뾰족한 수를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전조는 자신의 부탁을 부탁이 아닌, 항상 하던 장난을 약간 개조시킨 것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이제 산을 다 내려가서 저 멀리서 인가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쉴 수 있게 되서 기뻐하는 전조에 반해 백옥당은 시간이 가는 것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되려나. 서명, 서명을 받으려면…'

그 순간 백옥당의 머릿속에 퍼뜩 스치고 간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 서명만 있으면 되는거잖아.'

백옥당은 전조의 눈을 살며시 피해 아까의 종이와 필묵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전조의 필적을 한번 흉내내서 써본 다음, '모든 걸 용서한다.'는 종이의 서명란에 자기가 직접 전조의 서명을 하려고 했다.

그 때, 갑자기 백옥당의 머릿속이 울렸다.

'금모서, 그러면 안되지?'

포대인의 목소리였다. 백옥당은 얼른 손을 멈춰버리고 말았다.
이제 문제는 시간이었다. 저승사자가 준 시간은 산을 내려오는 데 거의 다 써버리고 서명위조도 실패한 이 마당에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전조!"

전조는 백옥당이 없어지자 잠시 소피라도 보러갔나 싶어서 풀밭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백옥당은 나타나자마자 전조 앞에 무릎을 꿇더니 전조의 서명이 없으면 자기가 불속에 들어간다는둥, 그 곳은 너무 끔찍했다는둥, 부디 살려달라는둥 보기에도 안쓰럽게 통사정을 했다.

전조는 백옥당의 괴상스런 장난에 조금 질려있었다. 갑자기 모든 걸 용서해달라는 것도 우습고, 굳이 서면절차를 원하는 것도 황당하거니와 불구덩이 운운하는 것도 뻔한 거짓말같았다. 그래도 저렇게나 통사정을 하는데, 오랫동안 알아온 정을 봐서라도 서명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 때 다시 백옥당의 머릿속이 울렸다.

'전원 출발!'

전조는 백옥당이 한심해보여 고개를 가로저어 흔들고서는 고맙게도 서명을 해 주었다.


저승사자의 짧은 외침이 백옥당에게 그리 무서운 것인줄 몰랐다. 결국 백옥당은 시간안에 서명을 받지 못했고, 백옥당을 저승으로 끌고 갔던 저승사자가 다시 나타나 지하의 문을 열더니 백옥당을 불구덩이로 집어넣고 말았다. 너무 뜨거워 나오려고 하면 창검을 든 저승사자들이 불구덩이로 도로 꾹꾹 눌러버렸다.




화로에서 밖으로 불똥이 튀었다. 의자에 앉아 탁자에 엎드린 채 잠들었던 백옥당은 그 불똥을 맞고 깜짝놀라 일어났다.
그의 상징과도 같은 흰 옷이 조금 타 있었다. 그러고보니 전조와 객잔의 같은 방에 묵고 있었는데, 전조도 자신을 마주보고 엎드린 채 자고 있었다. 이 방에는 침상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혼자 침상에서 자기 미안했던 전조가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백옥당은 전조를 깨워 침상에 끌어다 놓고는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전조는 백옥당의 꿈속에서 만큼이나 황당했지만 피곤에 못이겨 계속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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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Tom & Jerry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Heavenly Puss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