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훈련의 결과도, 기존의 표현방식도 아니었다. 바리시니코프가 몬트리올에 나타난지 몇년 후, 스테이지 위의 무용수를 다룬 로버트 그레스코빅의 책 발레 101의 서문에 그가 그를 원하는지 아닌지가 드러났다.
'그가 가진 모든 경험은 춤에 담긴 색채, 생기, 복잡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눈으로 본 것을 숙고해 입을 열었다. 내 경험상 우수한 무용수는 인생관을 가진 우수한 사람이다. 그들은 그들을 알고, 당신에게 이를 보여줄 수 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말했지만 이 역시 그의 탁월함에 대한 진실이다. 모두 그것을 봤고, 비트와 턴 외에도 그를 스타로 만들었다.
크로체처럼 쓴 크라소브스카야의 에세이는 1974년에 집필되었다. 비평가들은 그들이 보냈던 소비에트의 어린 무용수가, 여름 막바지에는 더이상 소련 예술인이 아님을 알았다. 몬트리올에서 토론토로 공연투어를 하던 6월 29일 밤, 바리시니코프는 공연을 마치고 친구들과 백스테이지에서 잡담을 나누고서 그들은 후에 그가 불안해보였다고 술회했다. 공연장 문을 통해 KGB가 순회공연을 따라다니며 공연단의 버스를 지키고 있던 주차장으로 빠져나갔다.
'이쪽이야, 미샤'
그 중 한 명이 말했는데 바리시니코프는 다른 길로 갔다. KGB요원이 그를 불렀지만 그는 가버렸다. 차로 몇 블럭을 도주해 친구들이 그 일을 수습했다. 차는 몇 시간을 달려갔고 그는 온타리오 숲의 시골집에 몇주간 머물렀다. 3일 후 캐나다 정부는 그의 정치적 망명을 허락했다.
집에서는 좋지 않은 소식을 받았다. 그는 키로프가 잃은 첫번째 무용수는 아니었다. 1961년에 루돌프 누레예프가, 1970년에 나탈리아 마카로바가 변절했다. 마카로바의 이탈 직후 그녀의 키로프 동료 발레리 파노브도 이스라엘 이민을 허가받았다. 바리시니코프만 돌아선 것이 아니었다; 그는 더이상 발레단 소속이 아니었다. 파노브의 상황은 국제적인 사안이 되었다. 유럽, 미국 사람들은 탄원서를 제출했고 소비에트 대사관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파노브는 스트라이크를 갈망했다. 결국 1974년 6월 바리시니코프는 캐나다로 떠났고, 소비에트 당국은 그를 단념하고 파노브와 그의 아내를 떠나게 했다. 이는 1974년에 소련에 불리한 여론 정도가 아니었다. 연초 알렉산더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가 서방에서 출판되자 솔제니친이 체포되었는데 그는 반역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시민권을 박탈당한 후 추방되었다. 사건 이후 러시아 당국은 다른 예술가들을 잃는 것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다.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떠나는 것이 가장 좋았다. 이상적인 형태는 서방의 경력이면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의 정치적 타격이었다. 탈출건들은 소련을 더더욱 감옥처럼 보이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