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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 project/包靑天

<단편> 변하지 않는 것






괜한 불안인지, 당연한 불안인지, 하여튼 불안감이 머리에서 자리를 잡아버렸다. 강호 친구들은 천하 각지에 흩어져있어 만나기가 어려운데, 요며칠 사이에 10년은 걸려야 다 만날까 싶었던 얼굴들을 거의 봤다. 그것도 함공도에서.

그리고 그들이 제각각 찾아와서 하는 말이란 모두 오서의 위험에 관한 것이었다. 민심이 너무 나빠 보름달이 뜨는 날 오서를 잡자는 사람들까지 생겼는데 그 규모가 커서 위험을 알리러 왔다는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라 친구라고 해도 '뭘 잘못들었겠지.'하고 흘려들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도 하나씩 속속 찾아오고 하나같이 같은 이야기를 하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오서 대부분이 마찬가지여서 결국 한창과 장평이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배에 올랐다. 장평은 이때까지도 태평해서 도박을 하다 며칠 놀고 올 심산이었는데 두 시진만에 함공도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강호 벗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백성들에게 파다하게 퍼진데다가 벽보도 있어 오래 조사하고 확인할 것도 없었고 일이 심각해 서둘러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폐하,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징수해야 합니다."
"폐하, 그것만은 안됩니다. 황실과 관아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황실과 백성이 같이 어려울 때 세금을 더 걷는다면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고 불만이 커질 것입니다."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와 모두의 얼굴을 스쳐갔지만, 논쟁은 그칠줄을 몰랐다. 황제를 부르고 있긴 했으나, 사실상 방태사와 포증 두 사람만의 언쟁에 다름 아니었다.

사안은 심각했다. 작년에 메뚜기떼가 한 차례 섬서와 그 일대를 쓸더니, 올해 봄에는 송나라 전역에 갑자기 쥐가 들끓기 시작해 나라의 곳간이며, 백성들이 모아둔 쌀이며 가릴것 없이 닥치는대로 갉아먹었다. 그래도 메뚜기는 한 번 재앙을 주고 다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한번 늘어난 쥐는 줄어들줄을 몰랐다. 민간의 피해는 아직 추산하지 못했으나, 황실과 각 부, 현의 곡식은 지난 해 같은 시기의 7할도 남지 않았다.

황제는 서둘러 팔현왕과 왕승상, 방태사와 포증을 불렀지만 세금을 더 걷자는 방태사와 그 방법만은 안된다는 포증이 충돌할 뿐, 다른 뾰족한 수가 나오지를 않았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천하의 식량 3할을 땅에서 솟아나게 할 능력은 없으니까.

"포증, 그럼 내가 백성을 핍박하려고 세금을 더 걷자는 것이겠소? 이 틈에 서하나 요국이 쳐들어와 우리가 허약한 군대로 전쟁을 치르면 백성이 오랑캐들에게 유린당할 거라는 생각은 왜 못하시오?"
"태사, 이번 재해로 식량이 없어 죽는 이가 나오기 시작해 민심이 흉흉하오. 그런 조치를 시행하면 아예 민심이 이반될지도 모르니…"
"됐소. 두 사람의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 그만하시오."

보다못한 황제가 둘을 제지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찌푸린 시선을 다른 두 명에게로 옮겼다.

"승상과 황숙도 말씀을 해 보세요."

왕승상과 팔현왕은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팔현왕이 왕승상에게 가볍게 손짓을 했고, 그러자 왕승상이 짧게 숨을 내뱉고는 입을 열었다.

"신의 생각에는 방태사와 포대인의 말이 다 일리가 있습니다."

왕승상은 네 사람이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방태사의 말대로 지금 남아있는 식량으로는 서하와 요국 중 하나만 침략한다고 해도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사자가 나오는 판국에 세금을 더 거둔다고 하면 필경 폭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시간이라도 멈춘듯, 왕승상이 잠시 말을 늦춘다는 느낌을 받은 건,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그러니 우리 고관들부터 솔선하여 얼마간을 내놓고, 황실도 내탕금을 풀어 백성들에게 세금을 조금씩 더 내도록 유도하면 어떠할런지요."

황제가 이번엔 팔현왕에게 물었다.

"황숙도 어찌 생각하는지 말씀해보세요."

모두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지만, 호명된 팔현왕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면서 황제의 지친 눈빛을 읽었다. 그렇다해도 팔현왕 역시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신은 왕승상의 의견이 현 상황에 가장 적절하다고 봅니다."

황제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짐도 그리 생각했소."
"하지만 그건…"
"태사는 더 좋은 의견이 있소?"
"…아닙니다."
"그럼 백성들에게 추수 후 작년 세금의 1할씩을 더 징수하라는 어명을 내리겠소. 내탕금 10만을 내놓을테니 경들도 백성들을 움직일만한 성의를 보여주기 바라오."








"대형, 어떻게 해야겠수? 넷째랑 둘째형까지 다 확인하고 왔다니 이제 정말 수를 내야하는데."

"그러게 대형,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鼠라는 글자가 영 기분이 나쁘다고. 그때 내가 얘기했던대로 멋있게 오룡(五龍)이나 오호(五虎), 하다못해 오구(五狗)나 오와(五蛙)라고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요."

"나는 차라리 오봉(五鳳)이 낫겠는데. 오추(五雛)도 좋으려나?"

"맞아, 그랬으면 고양이와도 괜찮았을텐데."

"지금와서 그 얘기가 다 무슨 소용이냐? 그럼 사람들이 몰려오거든 '저희는 이제 더 이상 오서가 아닙니다. 오룡이라고 불러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네, 알았습니다.'하고 돌아갈거라고 생각하는거냐?"

"아니, 그런건 아니지만."

"형, 제가 여기 땅을 깊이 파볼까요? 셋째가 좀 도와주고 며칠만 하면 우리 식구들 한달정도 숨을 공간은 만들 수 있어요."

"사내대장부가 잘못도 없는데 왜 땅을 파고 들어가 숨어요? 그냥 사람들이 몰려오거들랑 해명을 합시다. 우리는 쥐라고 이름은 지었지만 쥐가 아니라고 하면 들어먹을 거 아뇨?"

"그게 가능했으면 우리가 갔을 때 이미 하고 왔을거다. 말이 통할지도 의문이야. 지금."

"맞아. 목숨이 걸린 일이니 섣불리 움직이면 안된다. 그런 방법으론 어려워."

"우리가 떠나는 게 좋겠어요."

"무슨 뜻이지?"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의 목적은 우리 다섯이에요. 우리가 여기 있으면 함공도로 사람들이 몰려올테니 다른 사람들도 불안해하겠지요. 우리도 곤란해지고요. 그런데 반대로 우리만 없어지면 함공도 사람들이 위험할 일은 없어요. 우리도 위치를 숨길 수 있고요. 우리가 없는데 이 곳을 어찌하지는 않을겁니다."

"확실히 강호인이 아닌 이상 우리 얼굴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 그나마 쓸만한 생각이구나."

"다섯이 몰려다니는 것도 위험하니 흩어지죠. 함공도를 떠나면서까지 의심을 받으면 억울할거니."

"이달 보름까지 상황을 보는걸로 하고 괜찮으면 이 곳에, 그렇지 않으면 강녕주방에서 보는 걸로 하자. 아무래도 셋째의 행색이 가장 눈에 띄니 셋째와 한 명이 같이 가고, 나머지 세 명이 한 조다."

"제가 가죠."

"너도 무기가 특이해서…"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우리를 잘 아는 사람이면 애초에 이런데 휩쓸리지도 않았을거고, 운이 나빠 정체가 밝혀져도 우리 둘만으로 끝나니 위험부담이 줄어들지요."

"그 얘기를 듣고도 우리가 둘이 떠나게 두리라고 생각했다면,"

"운이 아주 나쁜 경우야. 그건."

"그래, 그런 일은 없어."








"세금을 더 내라고 하는건 절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호법들은 별다른 말을 보태려고 하지 않는듯 보였지만, 공손책은 그 반대였다. '지금 당장' 세금으로 곡식을 내고 죽을바엔, '나중에' 서하나 요국의 침략에 저항하지 못해 죽는 편을 선택할 백성이 적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방태사와는 늘 대립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 방태사의 말은 어느정도 일리가 있었다. 침략의 위험은 항상 안고 있었으니 백성들이 조금 고생스러워도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협력한다면 가장 좋은 결론이 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공손책은 백성들의 반발이 반드시 있을거라 예상하고 있는 것. 그런 거였다. 포증도 그런 것을 모르지 않았다.

"전호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대답한 것은 말이 끊겨버린 공손책이 아니라, 왕조였다.

"예. 밤까지는 돌아오기로 했으니 곧 올겁니다."








'상황을 살펴보고 돌아오라.'

이것이 전조가 받은 명령이었다. 상황이 가장 나쁘다는 곳은 남방이었지만 그곳까지 갈 여유는 없었고, 그럴 것까지도 없었다. 처음 보고한 지역에서 이미 상세한 장계를 올려 조정에서 이번 일을 알게 되었으며 굶주림에 지쳐가는 사람들, 지치다못해 북망산을 눈에 담는 사람들은 원치 않았지만 몇 명 발견했다. 이미 그들은 희망을 버린지 오래였다.

아직 힘이 남은 몇몇 장정이나 상대적으로 가진 곡식이 피해를 조금 덜 본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안이 자리잡았다. 그 불안은 변해가는 주위 상황에 따라 절망으로 변하는 것 같았지만, 절망보다는 분노를 키운 몇몇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분위기를 뒤바꿨다. 쥐덫이 사방에 놓였고, 쥐를 잡기위해 그 귀한 곡식에 비상을 뿌리는 사람도 있었다. 진위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사람이 잘못 먹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이야기정도로 그치는건, 일단 아직까지는 관에 이 일로 고발한 사람이 없어서다.

사람이 1년을 힘들여 경작한 곡식들을 갑자기 늘어난 쥐들이 먹었다. 늘어난 쥐들의 식량에 대한 책임을 사람이 져야한다는 이상한 일에 분통이 터진 거겠지만. 전조는 오늘 골목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자그마한 회색 강아지 한 마리를 봤는데, 골목을 나서자마자 말 그대로 사람들에게 참살당하고 말았다. 놀라서 두어걸음을 옮겨보니 꼬리가 길다란 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게 강아지로 보였을때는 왜소하다는 느낌까지 들었지만, 쥐라는 걸 알고서는 왜 그리도 커보이는지.

골목을 벗어나니 개봉의 시장이었다. 모두들 먹을 게 없어서일까. 파는 사람들도, 활기도 없는데 사람들은 몰려 있었다. 아마 어떻게든 식량을 구할 방법을 찾아 나와본 것이리라. 많은 사람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던건 사람을 해치려는 것보다는 쥐에게 화가 나서 그런 것일테지. 아직은 방이 나붙지 않았는데, 물자를 풀지는 못할망정 세금을 더 징수한다는 걸 알면 어떻게 분노가 터질지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물론 이건 아직 전조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람들 틈의 한 구석에 전조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 때 전조의 어깨를 뒤에서 잡았다. 전조는 순간적으로 손을 쳐내고 뒤로 돌아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 전조의 어깨를 잡았던 사람도 그 반응에 조금 놀라 뒤로 한발 물러서고 말았다.

전조는 경계가 지나친건지, 무딘건지 모르겠다는 목소리 하나를 들었다. 웃음기가 살며시 묻어있었다. 햇빛을 등진 방향으로 걷던 전조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데 시간이 걸렸다. 기억에 있는 느낌이라 적이 아니라는 걸 알고 긴장을 풀었다. 그의 눈이 먼저 드러났고 얼굴도 보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전조가 이전에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었다.

전조가 그의 이름을 불러 인사를 하자 그도 인사를 받았다. 격의없는 사이라기보다는 서로 예의를 갖추는 모습이었다. 상대는 갑자기 나타난 데 대해 너무 놀랄 것 없다는듯 살풋 웃고 있었다. 마음이 읽히는 것과 별개로 조금만 시선을 떨구면 왼손으로 전조가 쳐냈던 오른손목을 잡아흔드는 게 보였기에 한 사람인데도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는 천리독행객 악천구로, 개봉부와 약간 인연이 있었다. 특히 전조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그가 얼마간 심리시간을 벌어주지 않았다면 포증의 작두아래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악천구는 전조 바로 뒤에서야 앞에 있는 사람이 전조인 줄 알고 잡았던 것이고, 시장엔 사람이 워낙 많았던데다가 악천구가 전조를 알아보고 다가왔거나 살의를 품고 있던 게 아니어서 전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주변은 재회의 장소로 적당하지는 않았다. 악천구는 개봉성 밖의 조용한 산장에 며칠 머무를 예정이라고 했다. 전조는 개봉부로 돌아가야 했지만, 한두 시진 후에 들어가도 문제될 일은 없었다. 둘은 걸음을 재촉해 곧 성을 빠져나왔다.

전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번화한 수도는 악천구가 좋아할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는 황가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홀로 다니기를 즐기니 개봉성이 어울릴 리 없었다. 물론 지금의 개봉은 조금 다른 상황이지만. 악천구는 그 이후로도 이미 여러 곳을 다녀온 터였다. 개봉도 우연히 지나가는 여행지 이상의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지나는 곳마다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추억들이 있다면 개봉에 대해 가진 악천구의 기억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전조는 황가의 사건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을뻔한 적이 있는데, 심리도중 이미 다친 상태였던 악천구의 다리를 걷어찬 적이 있었다. 다리를 쓰지 못할까 걱정했던 이야기가 나왔다. 걷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걸음이 약간 불편해지리라고 생각했었고, 의외로 회복이 더뎌 한달은 그 고민을 했다. 달리 이것저것 신경쓰고픈 마음이 들지 않아 그 기간은 객잔에 머물었다. 얼마 있지 않던 돈은 한달간 객잔과 의원을 부르는 값으로 다 쏟아붓고 말았지만 벽호공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무인으로서는 심각한 고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차라리 그 때 걱정이 지금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걱정보다는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은 농담조였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은 십분 들었지만 마지막 작은 변명을 위해 미안하다는 말 뒤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악천구는 그가 이 정도를 심각하게 받아들일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사뭇 진지하게 반응하는 전조에게 조금 당황했다. 전조는 조금이었지만 고개마저 숙였다.

악천구는 자신도 어쩔 수 없었으며 전조만 가만히 있었으면 더 떠들었을거라며 다시 웃음을 살풋 내비쳤다. 그는 흰 옷에 검조차 들고 있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 하는 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당시의 생각이며 기억인 동시에 지금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진다고 해도 악천구는 그렇게 할 것이다.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다. 성 안의 풍경과 무관하게 이런 곳은 변하지도 않았다. 다만 악천구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그저 개봉성내보다 이 곳이 조용하기에 큰 소리를 낼 필요가 없어서인지, 그가 묻고싶었던 것 때문인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질문 자체는 의외로 간결했다.

"전대협은 강호인이오? 아니오?"

두 사람은 길이 좋아 걷는 속도를 늦췄다. 전조가 악천구를 보려고 했지만 옆얼굴이어서인지 아무 표정도 읽지 못했다. 전조의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질문에 다름 아니었다. 강호란 떠나고 싶다고 떠나고, 떠나기 싫다고 떠나지 않는 곳이 아니었다. 강호는 그 어디도 아니면서 천하의 모든 곳이다. 강호의 은원과 연관되어 있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강호인이다.

전조는 강호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을만치 많은 사람과 교분이 있었다. 항상 혼자 움직이는 악천구도 강호인임을 생각하면 전조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악천구가 이런 걸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는 정도는 서로 너무나 잘 알았다. 악천구도 전조가 지금 자신의 의도를 몰라 대답을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당시 전조는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는 걸 막으려는 악천구를 공격했었다. 악천구는 그의 이런 행동은 은원을 분명히 따지는 강호와 어울리지 않고, 악천구는 전조의 원한을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일의 대소를 따지는 행동은 강호인보다는 관원들의 생각에 가까운거라고 설명했다.

악천구는 포증이 전조를 죽음 앞에서도 구해주지 않았던 점에 크게 실망한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최선의 결과가 나왔으니 굳이 정의와 불의를 구분지어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던 것 뿐이다. 어쨌든 포증은 강호인이 아닌, 관리였으니까 관리다운 판단을 했던 것일게다. 하지만 전조가 확연히 강호인과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건 강호인들에게는 중요한 사안이 될 수 있었다. 어묘나 관리로서의 전조라면 세인들 대부분이 믿겠지만, 협객으로서의 전조를 강호인들이 믿어도 될지는 의심이 간다, 만약 관리와 강호인이 대립하는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전조는 주저없이 관리의 편에 서 있지는 않을까하는 이야기.

전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실은 많은 강호인들의 자신에 대한 시선이 이러하리라는 건 생각해봤던 일이다. 다만 자신에게 굳이 입을 열어보이는 사람이 있을거라던가, 대답하는 상황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논리의 앞뒤를 맞추거나 모범답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전조 스스로 납득할만한 솔직한 설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무슨 말이면 될지.

고심하던 전조의 답은 결국 '대답할 수 없다.'였다. 설령 대답한다고 해도 그건 거짓말이라고까지 했다. 전조는 언제나 스스로 옳다고 믿는 편에 설 것이며, 포증의 아래 있는건 그라면 언젠가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리라고 믿기 때문이지, 포증이 관리라서는 아니라고.

전조를 비롯, 장룡과 조호는 그 때 포대인을 다치지 않게 하면 자신들과 달리 정말 억울한 사람들을 적어도 셋보다는 많이 구할 수 있을거라고 믿어서 그랬던 것. 당시 함께 있던 악천구도 세 사형수들이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강호인과 다른 사고방식이며, 강호인임을 부정당해야 하는 이유라면 어쩔 수 없다고도 했다. 나중에라도 강호인이든, 관리든 스스로 옳다고 믿는 편에 서 있을거라고.

악천구는 팔짱을 끼었다. 거짓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불가능한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악천구가 보는 지금의 전조는 어떤 아픈 이야기라도 투명하게 말하는 사람같았다. 눈을 피하지도 않았고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것 말고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분위기가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말을 다 들은 악천구의 대답도 관리든, 강호인이든 상관없이 그는 믿는다는 거였다. 악천구 역시 그렇게 말해도 자신의 말에 책임질 자신이 있었다. 사실 그는 한가지 전해줄 소식도 갖고 있었다. 물론 전조의 대답여하에 따라 그냥 개봉을 떠나버릴까도 했지만 이제 그럴 이유가 없었다. 소식은 조금은 놀라운 것이어서 전조는 결국 그 날 개봉부에 돌아가지 못했다.

여러 곳을 다녀온 악천구가 보고 들은 것은 전조가 개봉에서 보고 들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청난 재해로 인한 삶의 포기, 쥐들에 대한 극도의 반감과 분노의 표출. 하지만 개봉보다 더 지나친 부분이 있었다. 조금 더 거칠거나, 혹은 더 여유가 없었다. 악천구의 말로는 쥐에 대한 분노가 쥐라는 별호를 가진 오서에게까지 튀었다고 했다.

오서는 누구에게 원한살 일을 하지 않았다. 애당초 오서가 뭔가를 잘못해서라기보다 단지 쥐라는 이름을 가진 탓이었다. 쥐라면 무조건 싫은 거였다. 오서는 강호에서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지만 보통 사람들은 간혹 별호를 들어본 정도였다. 그의 말로는 이달 보름을 기해 함공도에 가서 오서를 잡자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으며 정말 얼마나 가려는 건지는 알 수 없어도 일단 표면적인 호응은 상당히 크다고 했다. 오서가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사람들이 목적을 갖고 수백수천명이 몰려간다면 아무일 없이 끝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관아에서는 벽보와 벽보에 대한 과열된 호응 정도로는 전혀 나서지 않았다. 일단 중심내용이 황실이나 관아, 관리들에 대한 불만사항이 아니었고, 관아가 평소 강호인에 대해 호의적인 것도 아니었다. 또 관아에서 이런 전례가 없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를 몰랐다. 혹은 일부러 방관하고 있는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전조는 의아한 점이 있었다. 악천구가 다닌 경로를 종합하면 개봉은 함공도로 가는 길의 경유지가 아니라 반대쪽으로 점점 멀어지는 길목이었다. 개봉이 아니라 함공도로 갔다면 이미 며칠 전에 함공도에 도착해서 오서들에게 소식을 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예 알리지 않을 의도라면 모르되 왜 개봉까지 와서 소식을 전한걸까.

이유는 단순했다. 어떤 의미로 악천구도 군중들과 심리가 비슷했다. 악천구는 어릴 때 쥐에게 팔을 물려 독이 오른건지 열흘정도 고생한 기억이 있었다. 심지어 무공도, 배우면 쥐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다고 하기에 시작했다고 대답했다. 오서의 별호만 들어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지만 전조와 오서의 사이를 모르지 않았고 워낙 오래된 마음이다보니 더한 자극이 주어져도 쉬이 휩쓸리지 않았다. 그답지 않게 소극적인 방법을 선택했지만 그의 마음에서도 자신없는 행동은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 하나를 들은 것만으로 전조는 개봉부로 돌아갈 여유가 사라졌다. 개봉성의 문지기에게, 포대인에게 전하도록 살펴본 상황과 악천구에게 들은 이야기 중 이번 사안과 관련되는 일들, 그리고 급히 떠나게 되는 경위를 적었다.

전조라고 해서 특별한 대책이 있지는 않았다. 일단 알려줘서 최소한 자리를 피하게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모자라 조급함이 앞섰지만 부근에서 말을 빌려타 다음 성까지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말을 잘 돌봐줄 조용한 객잔을 찾고보니 해가 저문 늦은 시간이 되었다. 어쨌든 오늘 잘 쉬어야 내일도 먼 거리를 갈 수 있었다. 사람도 그렇고, 말도 그랬다. 성 입구에서 많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심각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길목에서 사람이면서 쥐를 자칭하는 오서를 잡으러 가자는 붉은색 벽보는 발견했다.

개봉부는 포대인이나 누군가가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식량이 모자랐고 쥐에 대한 분노가 드러났지만 개봉부의 일은 자신 말고도 교위들이 왠만큼 대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은 자신밖에는 할 사람이 없었다. 개봉부를 오래 비울 수 없어 빨리 끝내야 하기는 했지만.

전조가 직접 말을 객잔 마굿간에 두는데 이번엔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그 사람은 말없이 점점 다가왔다. 전조는 걷는 소리를 듣고 이미 누군지 눈치챘고 실없이 웃고 말았다. 어차피 정체를 감출 의도가 전혀 없는 상대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전조를 불렀는데 전조는 고양이라고 부르지 않는 게 조금 의아했지만, 쥐에게 적대적인 분위기가 강호협객들 사이의 장난같은 게 아닌 현 상황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만나려던 사람 중 하나였다. 전조도 불과 몇 시진만에 만나게 될줄은 전혀 몰랐다. 백옥당은 노방, 장평과 함께 객잔에 투숙중이었다. 백옥당은 개봉의 수모, 강녕파파를 찾아가는 도중이라고 했다.

전조는 그들이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궁금했지만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강호인들은 도처에 많았고 오서는 강호에서 인지도가 높은 편이었으니까. 오서는 알아도 이들의 얼굴까지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어 몇몇 단어만 조심하면 정체가 탄로나 당장 매장당할 확률은 적었다. 함공도보다 안전할지, 위험할지는 추이를 봐야겠지만.

"내 잘못이 아냐. 형들 잘못도 아니고, 쥐들도 살고 싶었을거야. 사람들에게는 조금 아쉬운 면이 있어. 관아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으니 상관없고. 이런 식의 유람도 재미있어. 살아있으니 그걸로 충분해."

네 사람이 노방의 방에서 술을 마시는데, 백옥당이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악천구처럼, 백옥당도 변하지 않았다. 다른 오서들도 변했을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 이들은 강녕주방에 모이게 될 것이다. 며칠만에 오서에게 호의적으로 상황이 바뀌기도 어렵고, 이들 중 누구도 모르고 있었지만, 민심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킬 요소도 남아있기에 더더욱. 전조만 말을 갖고 있어 내일 함께 가지는 못하겠지만, 오랜만에 서로가 변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는 걸 확인한 셈이다. 한동안 위험을 피해다니고, 늘어난 일에 고생을 하겠지만 살아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전조도 오서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은 채 살아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