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AN project/包靑天

<우화별-5> 자객을 설득하다

遇和別 5.

"본관에게 원한이 있는가?"
"물론이다. 그러니 죽어줘야겠어."

포증은 얼른 일어나 앉았지만, 그의 앞에는 이미 시퍼런 칼날이 버티고 있었다.

"무고한 이를 죽이는 당신같은 사람 밑에 어떻게 남협이 있고, 호법들이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야. 조금 전에도 두 호법을 따돌리고 왔지만 당신을 지키려는 마음이 놀랍더군."
"호법들에게 무슨 짓을 한건가?"
"걱정은 되나? 안심해. 지금쯤 세상 모르고 자고 있을테니까. 별다른 일이 없다면 내일 정오에는 깨어날거다. 뭐 하루정도 고생을 하기는 하겠지. 호법들의 실력을 몰라서 조금 독한 약을 썼거든."

자객은 한 걸음 다가왔다.

"당신을 지키려고 마한과 장룡은 표창을 맞아줬지만, 당신은 그들 뒤에서 착하디 착한 사람들을 해치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포증, 당신을 죽이면 남협의 원한을 사겠지만 좋은 내 친구가 억울한 죽음을 맞은 걸 알고도 그냥 묵과할 수는 없다."

자객은 또 한 걸음을 다가왔지만, 침상에서 막 몸을 일으킨 포증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역시 모르는군."

복면을 한 자객은 목소리가 낮으면서도 맑아 듣기에는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좋은 이야기 상대가 아니었을까?

"원래는 자고 있을 때 죽이려고 했었다. 보자마자 죽일 생각이었으니까. 어쨌든 기왕 깨어났으니 알려주지. 나는 5년 전 네가 처형한 이평의 친구이다. 그가 기억은 나나?"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억울하지 않다고 말하며 죽어갔던 사람. 포증은 모든 잘못을 뉘우친 그의 형을 감해주고 싶었지만 너무나 죄가 커서 그럴 수 없었다.

"이평은 본관이 아무 증거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직접 모든 죄를 자백했네. 그는 자신의 의부를 살해했기에 자백했음에도 그 형량을 감해주지 못했던 것일세. 그런데…"
"바로 그 죄가 말이 안된다는거다. 그는 사람을 죽일 위인이 못돼. 닭 한 마리도 잡지 못해서 눈물흘리던 녀석이 어떻게 의부를 죽인다는건가? 의부라는 사람도 만나봤지만 이평은 물론 누구에게도 원한을 살만한 사람이 아니었어. 대체 당신이 그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다고 죄를 씌워 죽였냔 말이다."

포증은 말문이 막혔다. 사건 수사과정에서 이평을 두 번 만났고, 죄상이 드러난 후에 두 번 만났으니 이평에 대해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포증의 역할은 죄인을 단죄하고 억울한 이를 돕는 것.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는 채 죄만을 묻고 처벌을 결정한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랬다. 과거에 합격하고부터 지금까지도.

"이래도 그 판결이 옳았다고 할건가?"

판결이 잘못됐을까? 하지만 본인이 자백한 모든 증거가 맞아들어갔다. 그리고 자객의 말대로 이평의 의부인 여승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여승은 이미 병을 앓고 있었다. 누군가의 독살이 의심된다고 공손책이 조심스럽게 말했으나 이평 본인이 나타나 자백하지 않았다면 증거가 없어 그대로 묻혀버렸을 사건이었다.

"본관이 그를 단죄한 증거는 전부 이평 본인이 제시한 것일세. 그래도 본관의 판결에 불만이 있다면 이 사건을 재수사하겠네."

자객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재수사라고?"
"만약 재수사를 해서 정말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게 밝혀지면 본관이 폐하께 가서 본관의 잘못을 고하고 죄를 청하겠네."

이제 검날은 포증의 목 옆에 자리했다. 선연히 반사된 달빛에 포증은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렸다.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수를 써도 소용없다. 정말 살고싶거든 차라리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는 게 쉬울거야."
"본관의 판결에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면 그건 본관에게도 중요한 일일세.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말일세. 어찌 믿지 못하는가?"

자객은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빠르게 검을 거두어 검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말을 꺼낸 포증조차도 조금은 놀랐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좋아. 믿어보겠다. 당신 스스로 내 원수를 갚는 걸 도와주겠다는데 내가 말릴 이유는 없겠지."

포증이 막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자객은 오른손으로 포증의 어깨를 쳤다. 그러자 포증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나는 원수를 갚으러 온거야. 그걸 도와주겠다면 당신 목숨까진 필요없어."

자객은 올 때보다는 더 조용하게 떠나갔다. 이번에는 길을 막아선 호법들도 없었고, 그의 편을 들어주는 어둠만이 소리없이 그를 감싸줄 뿐이었다.




"어디갔다 오는거요?"

객잔의 아래층에서 어딘가 삐딱하게 앉은 백옥당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소강절이 막 객잔으로 들어서자 한마디 했다.

"아침은 드셨습니까? 저는 전대협에게 다녀왔습니다."
"그 고, 아니 전조에게는 왠일로…"

전조라고 했더니 말이 백옥당의 말이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이 객잔을 알려주고 저녁에 바쁘지 않으면 술이나 같이 하자고 편지를 남기고 왔습니다. 백대협도 시간이 괜찮으면 같이 한 잔 하십시다."
"전조가 온다고 했소?"

공무를 처리하러 왔으니 시간을 낼 리가 없다. 그게 고양이.

"문지기에게 편지를 남겼는데, 어제하루 아무일 없이 조용한 걸 보니 별 일 없는 것 같습니다. 오실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내가 몇 번을 졸라대도 공무가 있을때는 오지를 않았다. 그런데 나도 처음보는 사람이 편지를 남겼다고 올 리가 있나.

"아마 오지 않을거요. 공무수행이 어쩌고 할 때는."
"그런가요? 저는 올 것 같은데. 그럼 내기라도 하시겠습니까?"

승패가 뻔히 보이는 것을 걸고 내기를 하자니 이렇게 기쁠 때가 있으랴.

"그럼 무엇을 거시겠소?"
"음, 저는 별로 가진 게 없으니 지는 사람이 오늘 술값을 내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순간 백옥당에게는 지난번 청운객잔에서 낸 90냥 본전이 생각나 속이 쓰렸지만, 어쨌든 공짜술이라니 반갑고 반가웠다.

"그러십시다. 그럼 아침은 내가 사지요."

밤에는 공짜말술을 마셔줄테니.





개봉부의 아침은 소란스러웠다. 밖에서 쓰러진 채 밤바람을 다 맞은 두 사람은 날이 밝도록 깨어나지 못했다. 마한과 장룡은 왕조가 아침이 되어 개봉부를 둘러볼 때가 되서야 발견되었다. 왕조는 깜짝 놀라 조호와 공손책을 불러왔고, 공손책은 왕조, 조호와 함께 그들을 처소로 옮겨 진맥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옮기는데도 깨어나지 않은 걸 보면 필시 깊은 잠에 빠진듯하네. 표창에 박힌 상처 외에는 별다른 외상도 없으니 곧 깨어날걸세."
"단순히 잠든거라면 어째서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까요?"
"표창에 약이 묻었네. 하지만 극독은 아니고 마비산과 비슷한 약일세. 조호, 얼른 포대인께 가보게."
"네?"
"개봉부에 누군가 침입했다면 당연히 포대인을 노리지 않겠는가. 이들이 쓰러졌으니 포대인이 큰일을 당하셨을지도 모르는 일일세. 그러니…"

조호는 공손책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황망히 나가버렸다. 왕조도 얼른 조호를 따라가려다 의아했는지 공손책에게 물었다.

"포대인께서 큰일을 당하셨을지 모른다면, 선생께서도 가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극히 낮은 가능성일세. 생각해보게. 날이 밝은지가 언제인가? 포대인께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이미 나나 자네에게 소식이 들어오지 않았겠는가?"

왕조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대인!"

조호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포증의 거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기 누구 없느냐? 대인이 없어지셨다."
"교위님, 무슨 일입니까?"

마침 지나가던 병졸이 조호의 외침을 듣고 달려왔다.

"포대인이 안보이신다. 어서 병사들에게 알리고…"
"조교위님, 왜 그러십니까? 포대인께서는 방금 정청에 가셨습니다."

조호는 갑자기 표정이 바뀌었다.

"뭐라고?"
"날이 밝은지가 언젠데 포대인이 여기 계시겠습니까? 포대인이 방금 정청에 가시는걸 똑똑히 보고 오는 길입니다."

멍해진 조호는 간신히 다음 마디를 내뱉었다.

"그, 그래. 가보게."
"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옆을 스쳐가는 병졸은 계속 뒤에 있는 조호를 흘끔흘끔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정청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는 포증이 있었다.

"조호, 무슨 일인가?"

아무일도 없었다. 포증은 정청의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조호를 맞았다.

"그, 그게, 공손선생께서 대인께 큰일이 났을거라고, 지금 마한과 장룡도 표창을 맞고 밤새 쓰러져있었고…"
"두 사람이 다쳤는가?"

어제 자객과 나눈 이야기를 전부 기억하고 곱씹고 있었으면서도 두 사람의 일은 잠깐 잊고 있었다.

"네. 크게 다친 건 아니지만, 표창을 맞은데다가 밤바람을 다 쐬고 마비산같은 약이 표창에 묻어있어서 그냥 좀 누워있…"
"그게 크게 다친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포증은 얼른 뛰어나갔고 조호는 여전히 멍한 채로 정청에 혼자 남겨졌다.

"그러니까, 크게 다친 게 맞긴 맞는데 그러니까…"



두 사람은 마한의 방에 함께 있었다. 평온하게 잠든 얼굴이라 다행히도 다른 사람들이 크게 걱정하지는 않게 해 주었다.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제 곧 정오가 되니 곧 깨어날겁니다."
"두 사람은 나 때문에 다친거요."

왕조는 당황스런 눈으로, 공손책은 어느정도 짐작했다는 듯이 포증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제 자객이 찾아왔었소. 5년전 이평의 사건을 재수사하기로 했소."
"그의 유족입니까?"
"친구라고 했소. 그리고 강호 이야기를 굳이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강호인인 것 같소."

공손책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그럼 강호인을 위주로 수사해야겠군요."
"무슨 말이오?"
"대인의 말씀은 자객이 강호인이었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포증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자객이 강호인이기는 하지만, 그건 이평의 사건과는 별개의 일이오. 나는 지금 약속을 지켜 재수사를 시작해야하오."
"그렇다면 대인을 습격한 자객을 그냥 두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우선 급한 것은 재수사요. 공손선생, 이제 과거가 끝났으니 전호위에게 돌아오라고 기별을 넣어주시오."
"그 일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자객의 일을 이대로 덮어둘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정말 그의 말대로 이평이 무고했다면 나는 책임을 져야하오."
"그가 범인일거라는 심증을 제기한 사람은 접니다."

포증이 옅게 웃는듯한 미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를 처형한 이는 본관이오."

공손책의 얼굴이 퍼뜩 굳었다. 공손책이 아무리 의혹을 제기했어도 그를 작두에 밀어넣은 것은 세간에 포청천이라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포증이었다. 잘못된 판결이라면, 그것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판결이라면, 그 경위가 어찌되었든간에 포증이 죄책감에 시달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재수사를 해봅시다. 공손선생은 두 사람을 돌봐주시오."

포증은 기운이 빠진 공손책을 그대로 두고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도 상당히 무거워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