遇和別 7.
"공손선생."
정오가 지나서야 눈을 뜬 마한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탁자 앞에 앉아 책을 읽던 공손책을 발견했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몸을 일으켰는데, 어젯밤 생각할 여유도 없이 몸의 힘이 쭉 빠진 것과 달리 어렵지 않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다만 일어나기 위해 다리를 움직였더니 찔린 부분이 어딘지 알만한 정도였달까.
"일어났나. 무리하지는 말게."
상처한번 입지 않았던 공손책이 어쩌면 그리도 다친 사람의 상태를 잘 아는지 늘 신기했다. 사람들이 다쳐서 돌아올 때 - 대개 전조였지만 - 누구보다도 정확한 판단을 하고 세심하게 오랫동안 곁을 지키는 사람이 바로 공손책이었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는 마한의 등을 얼른 달려와 받쳐주었다.
"극독을 당하지 않아 다행일세. 몸은 어떤가?"
"그럭저럭 견딜만합니다. 다리도 이제 괜찮고요. 아, 대인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장룡은…!"
갑자기 두 사람 생각이 났는지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그의 눈 속에 담긴 것은 자기 걱정이 아닌, 따뜻함 그리고 조급함이었다.
"아무일 없네. 다른 생각말고 자네 몸이나 보전하게."
전조라면 너무도 차분하게, 그러나 짧게 말을 잇는 공손책의 태도만 보고도 아주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음을 눈치챘겠지만, 마한은 도저히 그럴수가 없었다. 강한척 버티던 장룡이 쓰러지는 모습도 흐릿하게나마 기억했고, 자객이 남긴 말은 잊혀질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일 없다고요? 그 자객은 대인께 원수를 갚으러 간다고 했습니다. 장룡도 기절했고 전대인도 없었는데 어떻게 아무일이 없습니까?"
개봉부의 경비를 뚫고 들어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개봉부 표두들이 바보도 아니거니와 네 교위들의 무공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전조가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제 어려움을 떠나서 자객에게 심리적인 압력으로 작용할만한 점이였다. 하지만, 전조가 개봉부를 떠났다는 사람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터라 이번 일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복수를 하려는 누군가의 침입이라고 단정지을만 했다. 그만치 대단한 각오로 덤벼든 사람이라면, 게다가 교위들마저 제쳐버린 상대라면, 이미 무슨 큰일이 나야했다.
"이평의 사건 재수사를 조건으로 대인을 해치지 않고 그냥 나갔다고 하네."
보통때라면 일어난 일을 특유의 말재간으로 재미있게 말했을 공손책이건만 이번엔 말을 너무 아끼고 있었다. 짧았고, 계속 질문거리를 만들어냈다.
"이평의 사건은 수사가 끝났고, 그는 유족들도 없는데… 그럼 어제 온 사람은 누구입니까?"
침대에 가만히 기대앉은 마한은 이제 흥분해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회복된 상태였다.
"대인께 그의 친구라고 했다는군. 이름은 밝히지 않았네. 자네는 혹시 짚이는 것이 없나?"
마한의 옆에 언제나 있던 것처럼 조용히 서서 묻는 그의 모습은 여느 사건을 대할 때와 다름이 없었다. 똑같이 신중했고,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 것도 같았다. 마한이 조금만 더 이성을 되찾았다면, 포증의 안위가 개입된 일에 어째서 공손책이 이렇게도 차분할 수 있는지 기억해냈을 테지만 그렇지를 못했다.
"글쎄요. 강호인이라는 것 외에는 딱히 없습니다. 저나 장룡같은 개봉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호의를 품고 있는 것 같고, 오직 포대인께만 관심을 보였습니다. 갑자기 암기를 맞은거라 무공 수준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생각나는대로 이것저것 주워섬겼다. 야행복 차림으로 갑자기 날아든 자객을 보고 파악할 수 있는 건 마한으로선 이 정도가 전부였다.
"만약 다시 만난다면 그를 알아볼 수 있나?"
어느새 공손책은 마한의 반대편에 있는 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한은 그 탓에 공손책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얼굴은 모르지만, 목소리는 기억합니다."
고개를 약간 숙여 뭔가 생각하는 듯 보이던 공손책은 곧 짧게 말했다.
"알았네. 오늘은 좀 쉬도록 하게."
공손책은 그대로 나가버렸다. 마한은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빠르게 마한의 처소를 벗어난 그의 뒷모습을 보며 목으로 말을 삼켰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겁니까?'
"자네들 두 사람은 다녀올 곳이 있네."
해는 이미 기우뚱하는 모습을 뒤로한 채 저만치 넘어가 있었다. 어느덧 선명한 달그림자가 보일 때, 본의 아니게 다섯사람의 일을 전부 떠맡은 왕조와 조호는 조금 지쳐있었다. 개봉부에 왠 자객이 잠입해서 두 사람이 조금 다쳤다는 말은 공손책에게 전해 들었지만, 너무 바빠 만나보지도 못했다. 일 하나 끝냈다 싶으면 포교들이 새로운 일을 가져오고, 그거 끝냈다 싶으면 순찰시간이 되는 식으로 일들이 어디선가 짜여진 시간표처럼 나타나고 있었다.
"5년전에 심리했던 사건인데 기억할지 모르겠군. 이평이 여승에게 독을 먹여 살해했다는 그 사건인데, 다시 가서 사건정황을 상세히 조사해오게나."
"대인,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모습을 나타낸 그는 전조였다.
"전대인."
가벼운 눈짓으로 왕조와 조호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자 왕조가 한 마디를 던졌다.
"포대인, 그럼 지금 곧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나 전조가 나가려던 둘을 불러세웠다.
"어딜가나? 밤이 깊었는데."
포증은 전조의 말이 일리있다고 생각했는지 곧 말을 바꾸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가게. 이만 물러가도 좋네."
"네, 저…"
"왜 그러나?"
조호가 머뭇거리자 포증이 물었는데, 왕조가 가만히 조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아닙니다. 물러가겠습니다."
왕조가 포권을 하고는 그대로 조호를 끌었고, 조호는 엉겁결에 왕조를 따라 서재를 나섰다. 조호는 왕조를 따라가면서도 왕조에게 계속 뭐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이미 멀어진데다 작았던 그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화수현에서 별 일은 없었는가?"
잠시 왕조와 조호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전조가 포증의 질문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제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아무일 없이 지내다 왔습니다. 서신을 받고 오기는 했습니다만, 신임현령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어찌 부르셨습니까?"
"오늘쯤 새로 현령이 도착할거라고 황궁에서 연락이 왔기에 내가 조금 빨리 기별한 것 뿐일세. 자네도 힘들었을테니 가서 쉬게나. 그리고 이걸 가져가게."
포증이 건넨 것은 조그만 서책같은 것이었다. 별다른 특징도 없는 평범한 책에 불과했지만 오랫동안 개봉부에 머물렀던 전조는 그 책을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사건기록부가 아닙니까?"
"맞네. 내일쯤 읽어보고 혹시 이상한 점이 보이면 알려주게나."
"5년전의 것이군요."
전조는 이미 선 채로 책을 조금씩 훑어보고 있었다. 분명 5년전, 개봉부의 식구였던 전조에게 이 사건은 모르는 일이었다. 심리한 날짜를 보니, 성묘가느라 며칠간 자리를 비운 시기였다. 그러나 5년이나 지난 일의 사건기록부를 읽어보라는 이유로 딱히 짚이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소선생은 어디에 있나? 한번 청해야할 터인데."
"백옥당과 함께 청운객잔에 있습니다."
"그럼 내일쯤 두 사람을 모셔오게. 이제가서 쉬게나."
"네."
옅은 달빛과 조그만 궁금증을 안고서 일단 물러나왔다.
"잠깐만, 이것 좀."
조호가 뭔가 말하려는 걸 왕조가 굳이 막은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르긴 해도 느닷없이 5년전의 사건을 재수사하라는 것은 이상한 일임에 분명했다. 그래서 포증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보려는데 왕조는 조호를 말렸다. 그렇다고 왕조의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했을 리도 없으니 조호로서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만두고 다친 사람들이나 보러 가자. 전대인도 막 오셨는데, 지금 굳이 그 얘기를 꺼내서 어쩌려고 그래?"
"무슨 소리야? 전대인께 우리가 숨길 게 뭐가 있어?"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조호의 말에 왕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포대인이나 공손선생이 말씀드릴거 아냐? 전대인은 그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실텐데 우리가 여러가지 캐물으면 전대인을 소외시키는 걸로 오해할지도 모르고."
세 사람이 자기들끼리 아는 사실을 바탕으로 대화하면 확실히 남겨진 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법하다. 그러나.
"전대인이 어디 그런걸로 꽁해있을 분이냐?"
"차나 마시면서 마한이나 장룡한테 물어보자. 내 생각엔 두 사람이 어제 당한 일과 갑자기 사건수사를 다시 하려는 건 분명 관련이 있어. 전대인이 그런걸로 속좁게 굴지는 않으시겠지만, 그냥 미안해서 그런다."
알아듣게 설명했다고 생각했는지 왕조가 그제서야 잡았던 옷소매를 놓아주었다. 이미 포증과 전조만 놔두고 나온 마당이라 조호도 더 이상 고집은 부리지 않았다.
"그런데 차는 어떤 거야?"
"고향에서 가져온 벽라춘이 아직 남아있을걸."
그즈음 왕조의 방에 도착했는데, 능숙하게 찻잎을 꺼내려는 왕조의 손이 주춤했다.
"네가 먼저 가져가지 않았다면 말이지."
"어떻게 알았어?"
'능청스럽게 웃는 그 얼굴로 이미 시인하고 있잖냐.'라고 대답할까도 했지만, 더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그야, 여길 아는 사람은 너뿐이니까."
언젠가도 바로 지금처럼 차를 나눌까 했을 때, 조호가 왕조의 방까지 함께 따라들어왔던 것을 왕조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조호가 마셨다니 아까울 것은 없지만, 반면 환자들에게 주기엔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난감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아, 그래. 아까 순시중에 술 사둔게 있으니까 그거 가져가자."
왕조가 벙찐 표정을 하자 조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나?"
"순시중에 술을 샀다고?"
"국법에 순시 중 술을 사서는 안된다는 조항은 없을걸. 아마 여기쯤 둔 것 같은데. 찾았다."
어느새 자연스레 왕조의 침상 밑을 들춰서 흰 호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리 크지는 않아서 한 사람 앞에 두 잔정도밖에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도 대단히 독한 술이리라. 그러나 왕조는 자신의 방에 이런 물건을 들인 적이 없었다.
"이게 왜 내 방에 있어?"
"네 방이 개봉부 뒷문에서 제일 가깝잖아."
왕조는 할 말을 잃었다.
"공손선생."
정오가 지나서야 눈을 뜬 마한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탁자 앞에 앉아 책을 읽던 공손책을 발견했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몸을 일으켰는데, 어젯밤 생각할 여유도 없이 몸의 힘이 쭉 빠진 것과 달리 어렵지 않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다만 일어나기 위해 다리를 움직였더니 찔린 부분이 어딘지 알만한 정도였달까.
"일어났나. 무리하지는 말게."
상처한번 입지 않았던 공손책이 어쩌면 그리도 다친 사람의 상태를 잘 아는지 늘 신기했다. 사람들이 다쳐서 돌아올 때 - 대개 전조였지만 - 누구보다도 정확한 판단을 하고 세심하게 오랫동안 곁을 지키는 사람이 바로 공손책이었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는 마한의 등을 얼른 달려와 받쳐주었다.
"극독을 당하지 않아 다행일세. 몸은 어떤가?"
"그럭저럭 견딜만합니다. 다리도 이제 괜찮고요. 아, 대인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장룡은…!"
갑자기 두 사람 생각이 났는지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그의 눈 속에 담긴 것은 자기 걱정이 아닌, 따뜻함 그리고 조급함이었다.
"아무일 없네. 다른 생각말고 자네 몸이나 보전하게."
전조라면 너무도 차분하게, 그러나 짧게 말을 잇는 공손책의 태도만 보고도 아주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음을 눈치챘겠지만, 마한은 도저히 그럴수가 없었다. 강한척 버티던 장룡이 쓰러지는 모습도 흐릿하게나마 기억했고, 자객이 남긴 말은 잊혀질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일 없다고요? 그 자객은 대인께 원수를 갚으러 간다고 했습니다. 장룡도 기절했고 전대인도 없었는데 어떻게 아무일이 없습니까?"
개봉부의 경비를 뚫고 들어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개봉부 표두들이 바보도 아니거니와 네 교위들의 무공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전조가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제 어려움을 떠나서 자객에게 심리적인 압력으로 작용할만한 점이였다. 하지만, 전조가 개봉부를 떠났다는 사람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터라 이번 일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복수를 하려는 누군가의 침입이라고 단정지을만 했다. 그만치 대단한 각오로 덤벼든 사람이라면, 게다가 교위들마저 제쳐버린 상대라면, 이미 무슨 큰일이 나야했다.
"이평의 사건 재수사를 조건으로 대인을 해치지 않고 그냥 나갔다고 하네."
보통때라면 일어난 일을 특유의 말재간으로 재미있게 말했을 공손책이건만 이번엔 말을 너무 아끼고 있었다. 짧았고, 계속 질문거리를 만들어냈다.
"이평의 사건은 수사가 끝났고, 그는 유족들도 없는데… 그럼 어제 온 사람은 누구입니까?"
침대에 가만히 기대앉은 마한은 이제 흥분해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회복된 상태였다.
"대인께 그의 친구라고 했다는군. 이름은 밝히지 않았네. 자네는 혹시 짚이는 것이 없나?"
마한의 옆에 언제나 있던 것처럼 조용히 서서 묻는 그의 모습은 여느 사건을 대할 때와 다름이 없었다. 똑같이 신중했고,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 것도 같았다. 마한이 조금만 더 이성을 되찾았다면, 포증의 안위가 개입된 일에 어째서 공손책이 이렇게도 차분할 수 있는지 기억해냈을 테지만 그렇지를 못했다.
"글쎄요. 강호인이라는 것 외에는 딱히 없습니다. 저나 장룡같은 개봉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호의를 품고 있는 것 같고, 오직 포대인께만 관심을 보였습니다. 갑자기 암기를 맞은거라 무공 수준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생각나는대로 이것저것 주워섬겼다. 야행복 차림으로 갑자기 날아든 자객을 보고 파악할 수 있는 건 마한으로선 이 정도가 전부였다.
"만약 다시 만난다면 그를 알아볼 수 있나?"
어느새 공손책은 마한의 반대편에 있는 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한은 그 탓에 공손책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얼굴은 모르지만, 목소리는 기억합니다."
고개를 약간 숙여 뭔가 생각하는 듯 보이던 공손책은 곧 짧게 말했다.
"알았네. 오늘은 좀 쉬도록 하게."
공손책은 그대로 나가버렸다. 마한은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빠르게 마한의 처소를 벗어난 그의 뒷모습을 보며 목으로 말을 삼켰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겁니까?'
"자네들 두 사람은 다녀올 곳이 있네."
해는 이미 기우뚱하는 모습을 뒤로한 채 저만치 넘어가 있었다. 어느덧 선명한 달그림자가 보일 때, 본의 아니게 다섯사람의 일을 전부 떠맡은 왕조와 조호는 조금 지쳐있었다. 개봉부에 왠 자객이 잠입해서 두 사람이 조금 다쳤다는 말은 공손책에게 전해 들었지만, 너무 바빠 만나보지도 못했다. 일 하나 끝냈다 싶으면 포교들이 새로운 일을 가져오고, 그거 끝냈다 싶으면 순찰시간이 되는 식으로 일들이 어디선가 짜여진 시간표처럼 나타나고 있었다.
"5년전에 심리했던 사건인데 기억할지 모르겠군. 이평이 여승에게 독을 먹여 살해했다는 그 사건인데, 다시 가서 사건정황을 상세히 조사해오게나."
"대인,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모습을 나타낸 그는 전조였다.
"전대인."
가벼운 눈짓으로 왕조와 조호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자 왕조가 한 마디를 던졌다.
"포대인, 그럼 지금 곧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나 전조가 나가려던 둘을 불러세웠다.
"어딜가나? 밤이 깊었는데."
포증은 전조의 말이 일리있다고 생각했는지 곧 말을 바꾸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가게. 이만 물러가도 좋네."
"네, 저…"
"왜 그러나?"
조호가 머뭇거리자 포증이 물었는데, 왕조가 가만히 조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아닙니다. 물러가겠습니다."
왕조가 포권을 하고는 그대로 조호를 끌었고, 조호는 엉겁결에 왕조를 따라 서재를 나섰다. 조호는 왕조를 따라가면서도 왕조에게 계속 뭐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이미 멀어진데다 작았던 그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화수현에서 별 일은 없었는가?"
잠시 왕조와 조호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전조가 포증의 질문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제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아무일 없이 지내다 왔습니다. 서신을 받고 오기는 했습니다만, 신임현령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어찌 부르셨습니까?"
"오늘쯤 새로 현령이 도착할거라고 황궁에서 연락이 왔기에 내가 조금 빨리 기별한 것 뿐일세. 자네도 힘들었을테니 가서 쉬게나. 그리고 이걸 가져가게."
포증이 건넨 것은 조그만 서책같은 것이었다. 별다른 특징도 없는 평범한 책에 불과했지만 오랫동안 개봉부에 머물렀던 전조는 그 책을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사건기록부가 아닙니까?"
"맞네. 내일쯤 읽어보고 혹시 이상한 점이 보이면 알려주게나."
"5년전의 것이군요."
전조는 이미 선 채로 책을 조금씩 훑어보고 있었다. 분명 5년전, 개봉부의 식구였던 전조에게 이 사건은 모르는 일이었다. 심리한 날짜를 보니, 성묘가느라 며칠간 자리를 비운 시기였다. 그러나 5년이나 지난 일의 사건기록부를 읽어보라는 이유로 딱히 짚이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소선생은 어디에 있나? 한번 청해야할 터인데."
"백옥당과 함께 청운객잔에 있습니다."
"그럼 내일쯤 두 사람을 모셔오게. 이제가서 쉬게나."
"네."
옅은 달빛과 조그만 궁금증을 안고서 일단 물러나왔다.
"잠깐만, 이것 좀."
조호가 뭔가 말하려는 걸 왕조가 굳이 막은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르긴 해도 느닷없이 5년전의 사건을 재수사하라는 것은 이상한 일임에 분명했다. 그래서 포증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보려는데 왕조는 조호를 말렸다. 그렇다고 왕조의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했을 리도 없으니 조호로서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만두고 다친 사람들이나 보러 가자. 전대인도 막 오셨는데, 지금 굳이 그 얘기를 꺼내서 어쩌려고 그래?"
"무슨 소리야? 전대인께 우리가 숨길 게 뭐가 있어?"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조호의 말에 왕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포대인이나 공손선생이 말씀드릴거 아냐? 전대인은 그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실텐데 우리가 여러가지 캐물으면 전대인을 소외시키는 걸로 오해할지도 모르고."
세 사람이 자기들끼리 아는 사실을 바탕으로 대화하면 확실히 남겨진 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법하다. 그러나.
"전대인이 어디 그런걸로 꽁해있을 분이냐?"
"차나 마시면서 마한이나 장룡한테 물어보자. 내 생각엔 두 사람이 어제 당한 일과 갑자기 사건수사를 다시 하려는 건 분명 관련이 있어. 전대인이 그런걸로 속좁게 굴지는 않으시겠지만, 그냥 미안해서 그런다."
알아듣게 설명했다고 생각했는지 왕조가 그제서야 잡았던 옷소매를 놓아주었다. 이미 포증과 전조만 놔두고 나온 마당이라 조호도 더 이상 고집은 부리지 않았다.
"그런데 차는 어떤 거야?"
"고향에서 가져온 벽라춘이 아직 남아있을걸."
그즈음 왕조의 방에 도착했는데, 능숙하게 찻잎을 꺼내려는 왕조의 손이 주춤했다.
"네가 먼저 가져가지 않았다면 말이지."
"어떻게 알았어?"
'능청스럽게 웃는 그 얼굴로 이미 시인하고 있잖냐.'라고 대답할까도 했지만, 더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그야, 여길 아는 사람은 너뿐이니까."
언젠가도 바로 지금처럼 차를 나눌까 했을 때, 조호가 왕조의 방까지 함께 따라들어왔던 것을 왕조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조호가 마셨다니 아까울 것은 없지만, 반면 환자들에게 주기엔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난감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아, 그래. 아까 순시중에 술 사둔게 있으니까 그거 가져가자."
왕조가 벙찐 표정을 하자 조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나?"
"순시중에 술을 샀다고?"
"국법에 순시 중 술을 사서는 안된다는 조항은 없을걸. 아마 여기쯤 둔 것 같은데. 찾았다."
어느새 자연스레 왕조의 침상 밑을 들춰서 흰 호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리 크지는 않아서 한 사람 앞에 두 잔정도밖에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도 대단히 독한 술이리라. 그러나 왕조는 자신의 방에 이런 물건을 들인 적이 없었다.
"이게 왜 내 방에 있어?"
"네 방이 개봉부 뒷문에서 제일 가깝잖아."
왕조는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