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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 project/包靑天

<우화별-8> 공손책의 생각

遇和別 8.

"그래도 괜찮은 모양이네. 걸어다니는 걸 보니."

마한의 방은 그리 넓지 않았다. 게다가 뜻하지 않게 장룡과 한 방에 머무르고 있었기에 조금은 더 좁아보였을 것이다. 둘을 한 방에 데려다 놓은 이유는 아무래도 치료를 도맡게 될 공손책의 동선을 줄여보려는 노력, 그리고 두 사람이 마한의 방 근처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치료를 받게 하려고 서둘렀던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장룡이 특히 더 무거웠기에 마한의 방에서는 거리가 다소 떨어진 장룡의 거처까지 데려다 놓기가 힘들다는 생각도 들었고, 굳이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기도 했다. 정오가 조금 지나 마한보다 약간 늦게 깨어났지만, 어차피 쉬어도 좋다는 말이 떨어진 마당에 자기 방으로 반드시 돌아가야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장룡에게 자신의 거처란 딱딱한 침대와 탁자 하나가 간신히 굴러다니는 심심하고 투박하기 그지없는 공간에 지나지 않았으니 모처럼 동료와 한 방에서 편히 머물려는 마음은 그리 신기할 일도 아니었다.

그 때 장룡은 가만히 앉아 창 밖을 바라봤고, 갑갑하게 한 방에 오래 있자니 지루해서 마한은 저도 모르게 돌아다녀도 뻔한 구조의 방에서 서성거리던 차에 왕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왕조의 뒤로 조호도 따라 들어왔는데 들어오자마자 탁자에 흰 호리병부터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자 왕조는 일부러 멀뚱거리면서 두 사람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는데, 그 덕분에 놀라서 입을 떡 벌린 장룡의 시선을 무시할 수 있었다.

"누워있는 사람한테 술을 가져다주는게 언제 생긴 예의더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버린 마한이었다. 그다지 놀랄 것도 없다는 듯이 담담하게.

"누워있지 않잖아. 멀쩡한데 뭘 그래?"

하긴 그렇다. 누워있는 게 더 곤혹스러울만치 아무렇지 않았다. 독이 아니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암기를 던지고 하는 말을 아무런 의심없이 믿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마한이나 장룡 모두 의아했다. 포대인을 죽이겠다면서, 강호에 잠깐 몸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들에게 이토록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이유는 알기 어려웠다.

"뭐, 움직일만하네. 공손선생도 쉬라하시고 대인께서도 오늘은 자네들에게 일을 맡기겠다고 하시니 이러고 있는 것 뿐이지."
"음,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말좀 해보게. 포대인이 갑자기 5년 전 사건을 재수사하라고 하시고, 자네들은 쓰러져 있었는데 분명 무슨 관련이 있지?"

왕조가 나름대로 심각하게 중요한 질문을 했다. 부내에서 쓰러진 동료 두 사람과 갑작스런 재수사. 모르긴 해도 이들은 뭔가 더 알고 있으리라. 포증도 공손책도 왠일인지 전말을 알려주지 않았고, 그 때문일까. 왠지 모를 불안감만 더 가중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어떤 이유에서든 포증이나 공손책의 지시없이 자발적으로 사건에 달려든 게 언제였나 싶어 아득함마저 느낀 왕조였다.

"잔은 없나?"

장룡에게는 이게 더 중요한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밤이 늦게는 했어도 며칠간 보기 드물게 편안히 쉬었던 전조는 피곤한 줄을 몰랐다. 포증에게 보고를 마쳤으니,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대접도 못했던 백옥당을 찾아갈까 했다. 아마도 그리했을 것이다. 전조의 머릿속에 소강절의 한 마디가 지나가지만 않았다면.

'개봉에 쥐를 잡지 못하면서 마음씨 좋은 주인을 만나 잘 먹고 잘 사는 고양이가 있다 했습니다.'

세세한 설명도 필요없었다. 백옥당이라면 어쩌다 실수로 지붕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길을 찾지 못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고양이를 한 손으로 잡아채서는 '전조는 이렇게 생겼어!'라고 우길 위인이다. 물론 한두번 겪은 일은 아니지만 그 일이 떠오른 지금, 며칠간 공무로 바빠 제대로 맞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백옥당을 찾아가 술잔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고양이… 고양이라…'

내가 정말 고양이를 닮은 것일까. 그러고보니 얼굴을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얼굴을 보려면 물가에 가거나 작던크던 경(鏡)이 있어야 할 터인데, 물가에 여유로이 앉아 평온함을 즐길 시간을 가진 것도 제법 오래 전이었고, 남자만 득시글한 개봉부에 거울을 가진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오래되기는 했지만, 기억을 더듬어 자신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냈다. 그래도 그 속에 너무도 날카로워 베일듯한 눈매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덤벼드는 제멋대로인 성향은 없었다. 마냥 따뜻하거나 멋지지는 않더라도 그저 세상에 남아있을만한 사람 하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내릴 수 있는 비평은 이 정도였다.

어느새 방에 도착했다. 변한 것 하나없었지만 언제나 여기만 오면 쉬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해지는 조그만 방. 언제나처럼 문을 살짝 밀고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에 놓인 탁자에 거궐을 내려놓았는데, 그 서슬에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은 조그만 사건기록부가 전조의 손을 벗어나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사건기록부. 공손책이 작성하는 모습을 늘 봐온 터였다. 사대호법과 전조 자신이 수사할 때 여러차례 고생을 하긴 하지만, 공손책은 항상 수사가 끝난 후에 기록부를 작성하느라 꼬박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렇게 작성된 사건기록부가 개봉부 서가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오래전부터 보아왔고, 때로 공손책이 기록부를 완성하고 잠이 들면 전조가 직접 서가에 꽂아두고 그를 침상에 눕혀주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 기록부라는 것을 다시 읽는 모습은 도통 본 적이 없어 무엇때문에 긴 시간을 들여 굳이 작성하는지 늘 궁금했었다. 그 앞을 지나칠때마다 시간이 나면 읽어볼까했지만, 시간이 날 때 나타나는 건 기록부보다는 백옥당이었다. 그런 탓에 기록부를 직접 읽어본 적은 없었고, 이걸 일삼아 읽게 되리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만약 사건내용과 수사과정을 적어내려간 것이라면 전조 자신의 이야기도 조금은 들어갔으리라. 과연 공손책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하는게 순간 궁금해졌다. 하지만 책을 펴들자 그런 의문은 잠시 접어두어야 했다.

"난 이 때 없었지, 참."

성묘하러 떠난 동안 해결된 사건 하나가 있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책은 꽤나 딱딱한 어투로 명료하게 작성되어 별로 재미는 없었다.



술은 많지 않아 겨우 두어 잔씩 돌아갔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마한이 열심히 설명하느라 그 틈에 조호가 한 잔을 빼앗아 마셨고, 장룡도 어느새 한 잔을 더 마셨는데 느지막히 왕조가 술병을 기울여 보고서야 자신이 마실 한 잔을 누군가가 더 마셨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게 있네."

기나긴 설명을 마친 마한이 의문을 제기했다. 마한이 등을 떠밀어 장룡으로 하여금 간신히 처음 자객을 발견한 경위를 대강 설명하도록 한 다음부터는 마한이 말을 이어갔다. 자객에게 장룡과 마한이 암기로 공격받은 일, 암기를 맞고 쓰러질때까지 짧은 시간동안 자객이 두 사람에게 했던 말, 그리고 납득하기 어려웠던, 자객답지 않고 도리어 공손하다고도 할 수 있을 태도, 또 마한에게 공손책이 찾아와 이것저것 묻고 간 일 등 이들이 아는 것을 전부 알려주었다.

"뭐가?"

약간은 거나해진 조호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공손선생이 좀 이상하네. 그 분답지 않게 너무 태연해서 그게 마음에 걸려."

마한은 크게 개의치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어째서? 공손선생은 항상 그렇지 않았던가."

왕조가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공손책이라면 늘 냉정하게 사세를 판단하고 추리해온 인물이니 그가 태연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고 해도 그리 신기할 것은 없었다. 사람의 목숨이 걸린 다른 사건들에도 그는 그 태도로 잘 대처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마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냐. 지난날 효린을 구하러 갈 때 공손선생이 어땠는지 잊었나?"
"응?"

왕조가 멍해져서 반문했다.

"장원이 살해당하고 잉어였던 효린이 목단의 모습으로 둔갑했던 그 사건 말일세. 효린이 얼음기둥에 갇혔던 걸 포대인이 직접 가서 구하지 않았나."
"음, 난 알 것 같네. 모두 함께 갔었지, 아마. 그런데 그게 어때서?"

장룡이 오랜만에 한 마디를 던졌다. 마한도 곧이어 모두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우리 넷에 전대인, 그리고 포대인도 구하러 가겠다고 했는데 공손선생은 개봉부 식구들 모두를 비난하면서까지 포대인이 위험할거라고 반대하지 않았나. 포대인의 안위가 걸린 일이니 그리 침착하실리 없네."

따지고보니 그도 그랬다. 악의없는 이를 구하기 위한 일이었기에 호기롭게 나서던 네 교위들은 물론이고, 측은지심을 가져야하지 않느냐던 전조마저도 공손책에게 엄청난 질타를 받았다. 포대인이 크게 다칠 수 있다는 건 생각지도 않느냐며 모두를 비난했지만, 결국 당사자였던 포증의 강한 의지덕분에 공손책의 반대를 꺾고 효린을 구하러 갈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무사히 구출에 성공했었는데, 마한은 그 일을 거론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수수께끼는 더 쉬워지는군."

왕조가 한층 깊어진 눈빛을 드러내며 말했다. 언젠가부터 왕조는 술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계속 그 흰 술병을 쓰다듬듯이 만지면서 고개를 들어올려 동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쉬워지다니?"

마한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듯 잠시 생각하다가 겨우 입을 다시 열었다.

"모르겠나? 공손선생은 포대인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킬 자신이 있다는 걸세."
"점점 더 난해하군. 대체 무슨 뜻인가?"

마한이 마침내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화가 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을 알아듣지 못해 조금은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왕조는 마한에게 동요되지 않고 여전히 평온했고, 장룡과 조호는 그저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평의 사건은 사실상 공손선생이 전부 수사하지 않았나. 심리만 포대인이 한 거고. 그러니 최악의 경우가 되면…"
"최악의 경우가 되면… 그럼?!"

마한의 눈이 퍼뜩 커졌다. 왕조가 무슨 말을 할 생각인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장룡만이 눈치챘었다는듯 크게 놀라지 않았고, 조호는 아예 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모든건 당신 잘못이라고 하고 뒤집어쓸 생각이겠지. 증거도 완벽하니 공손선생이 직접 말 몇마디 덧붙이면 어려운 일도 아닐세. 또… 유감스럽지만 사실이기도 하고."
"어떻게 그런!"

조호도, 마한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게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공손책의 사람됨이나 그간의 행동을 따져보면 포증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은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도, 신기한 일도 아님에 분명했다. 게다가 공손책의 생각은 반드시 포증을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만 할 수도 없는게, 자칫하면 증거가 없는 사건으로 치부되어 미제사건으로 남을뻔했지만, 공손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증거자료를 찾아내어 조사한 사건이었다. 5년 전에는 수사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는 좋은 일이었겠지만, 이제와서는 책임져야할 일이 되고 말았다. 아니, 공손책이라면 존경하는 분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 남았음을 기뻐하고 있지 않을까.

"뭐, 아직 밝혀진 게 없으니 좀 더 두고봐야 될걸세. 공손선생의 생각대로 이번 일이 흘러가지 않았으면 좋겠네만."

왕조의 말대로 되어주기를 바라는 방법밖에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나머지 셋은 스스로의 무력함에 입술을 내리물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