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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 project/包靑天

<단편> 어느 하루

오랫동안 조용한 섬에서 아무 변화없이 지내는 게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차라 섬을 벗어나고 싶었다. 개봉에 온다고 뭐가 달라지랴마는 그래도 사람들이 많은 곳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돈을 그리 많이 가져오지 않았던 탓에 개봉에 도착할 즈음에는 간신히 돌아갈 비용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개봉에서 갖고있는 흰 부채를 팔아볼까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마음이 아파 도저히 팔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너무도 분명하게 이름을 적어넣은 부채가 팔릴런지에 대한 문제도 있었지만, 그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는 이를 찾아 적당히 하루쯤 신세를 지려던 게 정말 운이 없었는지 오늘따라 개봉에서 알던 사람들이 전부 친구를 만나러 갔다는 둥, 가까운 친척이 임종을 맞게 되어 방금 떠났다는 둥 하며 남아있지를 않았다.

그렇게 여러 지인들의 집을 순회하고보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백옥당은 드넓은 천하에 제 한 몸 머무를 곳이 없다는 걸 알자 조금은 서러운 감정이 생겼다. 그러나 그 와중에 개봉부 앞을 지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쌩 하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고 곧 그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추격했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은 급히 어디론가 가는 듯했지만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는 걸 느끼고는 몸을 날려 건물 옆에 숨었다. 과연 백옥당은 쫓던 이가 갑자기 사라지자 멈춰서서 차분히 주변을 살폈다. 어차피 지금의 그는 당장 잡아놓고 해결할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어쩐 일인가? 날 미행하다니…"

헤매는 백옥당의 뒤에서 나타난 그는 전조였다. 백옥당이 전조를 보고 따라가기는 했지만 애초부터 몰래 따라갈 생각이 아니었기에 기척은 전혀 숨기지 않았다. 이름을 불러 멈춰 세우지 않았을 뿐. 그러니 전조가 자신을 발견했다는 게 신기할 일은 아니었다.

"뭐야, 급히 가던 것 같은데 갑자기 이렇게 여유로워도 되나? 개봉에 왔다가 갑자기 집 떠나는 고양이가 있길래 궁금해서 따라와본 것 뿐이야."

그러자 전조는 곧 좁은 집 사이를 빠져나왔다.

"범인을 잡으러 왔지만, 어차피 다친 몸인데다 행선지를 알고 있으니 그리 급한 건 아냐. 그나저나 갑자기 왜 개봉에 왔나?"

조금은 진지한 답을 기대했건만 돌아오는 건 짧고 심드렁한 것이었다.

"그냥 놀러."

기대가 어긋났지만 전조는 얼굴빛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그랬군. 사고치지 말고 조용히 있다 갔으면 좋겠네."
"무슨 소리야?"
"자네가 사고를 치면 뒷수습은 나나 다른 개봉부 사람들이 해야하니 하는 말일세. 놀러 왔다니 사고치기 딱 좋은 상황이잖나. 그럼 난 가보겠네."
"야, 이 고양…"

백옥당이 발끈해서 달려드는데 뒤로 돌아가던 전조가 걸음을 멈췄다. 백옥당은 자기 말을 듣고 멈춰선 줄 알고 일장연설을 막 시작하려는데 전조의 입이 더 빨랐다.

"백옥당, 자네 어디에 묵고 있나?"

느닷없는 전조의 질문에 백옥당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풍류남아이며 사고따위는 칠 위인이 아니라고 설명하고자 정연히 세워놓은 논리체계를 잊었다.

"나? 나도 방금 왔는데."
"혹시 돈은 좀 있고?"
"아니, 별로…"

함공도에서 지내기가 지루하여 가출했다거나 그 과정에서 돈을 거의 다 써버렸다는 것은 생략했다. 물론 전조의 생각에는 백옥당 혼자라면 강호의 인맥을 동원, 적당히 아는 사람의 집에 묵을 수 있었기 때문에 돈이 없다고 해도 백옥당에게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보였다.

"이거 곤란하게 됐군."

전조가 혼잣말을 했는데 그 목소리가 조금 컸던 것인지 백옥당의 귀가 워낙 좋았는지 백옥당이 듣고 말았다.

"무슨 일인데?"

뭔가 전조답지 않은 말에 백옥당은 반문했고, 전조는 백옥당이 자기 말을 들었다는 데 약간 놀랐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백옥당에게 느낌이 들었다. 고양이 수염 하나를 잡은듯한.

"너 무슨일 있지? 말 안하면 확 개봉부에 가서 말해버린다?"
"안돼!"

백옥당은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전조가 뜻밖에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백옥당이 더 놀랐다.

"야, 왜 그래?"

전조가 눈을 꽉 감고 낭패한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백옥당도 어안이 벙벙해 전조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이렇게까지 된 이상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낫겠다 싶어 한숨을 한번 쉬고는 말했다.

"실은 이번에 잡으려는 범인이 너무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가서 또 호법들이 어렵게 쳐놓은 포위망에서 빠져나가 버렸거든. 그래서 방금 개봉부를 나오기 전 홧김에 범인을 잡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래서 개봉부로 갈 수 없다는거냐?"

전조가 조금은 무겁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백옥당은 갑자기 허리가 부러져라 웃기 시작했다.

"으하하, 와하하하."
"백옥당, 자시가 다 됐네. 민가에서 이렇게 크게 웃으면 곤란해."

전조는 역시 이야기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낯빛을 했지만 말로써 그걸 인정하면 사실이 되어버린다. 일말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던 전조는 개봉부에 몸담은 사람답게 말을 바꿨다. 그러나 백옥당은 멈추기는 고사하고 웃다가 웃다가 딸꾹질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딸꾹 개봉부의 고양이가 제 발로 집을 나와서 딸꾹 갈 데가 없다는 거 아냐? 으하하, 딸꾹."
"그만 웃고 딸꾹질이나 좀 멈춰보게. 개봉부에 우물이, 아니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한지 불과 일각도 되지 않았는데 또 개봉부를 떠올리는 전조였다. 백옥당은 그런 전조를 보고 아예 배를 부여잡고 앉아버렸다.

"넌 죽을때까지 개봉부의 고양이야. 딸꾹."

그렇게나 딸꾹질을 해대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놀리는 백옥당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개봉부의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백옥당은 주저앉아서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웃다가 검은 신발이 소리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얼결에 보고 간신히 일어났다.

"어디가?"

딸꾹질로 호흡이 곤란한 와중에도 할 말은 다 하고 있었다.

"범인이 간 방향에 아는 폐가가 하나 있네. 자네는 나와 달리 갈만한 곳이 있을테니 그럼 나중에 보세나."
"갈만한 곳이라니? 딸꾹."

말하기가 힘들어지자 백옥당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 어렵지 않게 딸꾹질을 멈췄다. 자기도 모르게 개봉부의 우물 이야기를 꺼낸 전조는 더 이상 백옥당의 딸꾹질 같은 데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다른 할 말만 했다.

"뭐, 강녕주방도 있을테고 개봉에 아는 사람은 있지 않겠나?"

있었다. 때마침 없어져서 그렇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백옥당의 계산으로는 자신이 갈만한 곳에 전조가 못 갈 것도 없었기에 가능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했다.

"너도 같이 가면 되잖아."
"난 좀 그렇지. 공직에 있는 몸이, 아무래도 개봉 내에서 별다른 이유 없이 다른 곳에 묵는다는 말이 새어나가는 건 곤란하니까."

정확히는 전조 자신이 홧김에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겠지만 백옥당에게 말한 것만도 천고의 실수였으니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나도 그쪽으로 갈까?"

백옥당이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전조는 자신을 놀리는 거라 생각하고 가볍게 웃었다.

"멀쩡히 갈 곳 있는 사람이 뭐 할일이 없어 폐가에 따라온다는 건가?"

그러나 전조의 생각과 달리 백옥당은 나름대로 심각했다.

"갈 데 없어. 강녕주방에는 가기가 싫고, 객잔에 묵을 돈은 없고, 아는 사람들한테 찾아갔더니 하나같이 오늘따라 집에 없고 어딜 나갔다잖아."
"강녕주방은 의모인 강녕파파가 계신 곳으로 자네에게는 집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텐데 가기 싫다니… 그런 망발이 어디있나?"
"뭐? 너 그런식으로 말하면 개봉부에 차던져 넣는다? 넌 무리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개봉부가 집이잖아. 네 방도, 네 물건도 다 있는 집."
"내가 언제 가기 싫다고 했나? 못 간다고 했지. 가기 싫은 것과는 다르다네."
"어이구, 말은 잘하네. 못가는 이유라는 게 너 때문이잖아. 잘 데가 없어서 들어왔다는데 포대인이 널 쫓아내기라도 할까봐서 그러냐?"
"…그만두지. 어쨌든 난 가볼테니 나중에 인연이 있으면 만나도록 하세나."

이번엔 정말 갔다. 그러나 뒤돌아 걸어도 백옥당이 의도적으로 하는 말소리는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가로저었는데 그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진심이 배어났다.

"아… 내가 그 때 묘강시독에 걸린 널 해독하는걸 돕는게 아니었는데… 대형은 저 고양이 어디가 좋아서."

전조도 지지않고 멈춰서서 백옥당을 똑바로 응시한 채 한 마디 했다.

"나도 중독된 자네에게 하나뿐인 해약을 내주다니 참 미련했던 것 같네."

혹여 전조가 자기 목소리를 듣지 못할까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전조를 따라가고 싶었던 건지 불과 한 발자국정도 떨어져 걸음을 함께하며 괜히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니가 어느 구석에 처박혀 죽든말든 내버려두는건데 뭐하러 널 구한답시고 홍화 사건에 끼여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조는 끝까지 백옥당에게 져 줄 생각이 없었다. 백옥당이 가까이 있다는 걸 안 전조는 이제 가던 길을 그대로 가면서 입만 움직였다.

"삼보를 훔쳐갔을 때 그냥 처형해달라고 주청을 드렸어야 했는데…"

나중에 백옥당은 전조가 아파 누워있을 때 물 한잔 떠다준 것 마저 후회했지만 두 사람이 그런 작태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생략하기로 한다.



"공손선생."
"네. 대인."
"전호위는 별 일 없겠지요?"

무슨 명이라도 내리려나 싶어 잠시 긴장했던 공손책은 일시에 그 긴장이 풀렸다. 들고 있던 붓을 잠시 내려놓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호위는 강한 사람이니 분명 별 탈없이 돌아올겁니다. 전호위는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까? 비적떼를 만난들 두렵다고 도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네 사람의 포위망을 뚫고 나갔는데 어찌 아무런 상의도 없이 혼자 나가버렸는지 원망스럽다가도 걱정이 되오. 잠은 제대로 자고 있는지… 공연히 이상한 사람을 만나 불편한 일에 휘말리고 있는건 아닌지…"
"대인, 걱정마십시오. 만약 전호위에게 정말 큰일이 생겼다면 개봉부로 돌아올 것입니다."
"맞소. 그럴거요. 전호위라면."

이 때 백옥당이 귀를 벅벅 긁어대고 있었다는 걸 전조는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이런 상황을 포증이나 공손책이 알 리가 없었다.



"2제."
"네. 대형."
"5제는 별 일 없겠지?"

별 생각없이 앉아있다가 노방의 질문을 받은 한장은 전혀 걱정이 없었다.

"대형. 5제는 절대 어디가서 얻어맞고 다닐 위인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무탈하게 있다가 돌아올 겁니다."
"하지만 아무런 언질없이 나갔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구나. 정말 전조를 찾아갔다면 괜히 개봉부 일에 관여할런지도 모르고…"
"괜찮을거에요. 5제에게 안좋은 일이 생겼다면 함공도로 돌아올 거고 그게 아니면 신호라도 보내겠죠."
"네 말이 맞다. 그래도 워낙 사고뭉치라 안심이 안되는구나."

역시 백옥당이 다시금 귀를 벅벅 긁어대기 시작했는데 투닥대던 전조가 괜찮냐고 물어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폐가라기에 귀신 나오게 생겼나 했는데 생각만큼 나쁘진 않네."
"포대인을 모시기 전에 몇 번 왔었지. 가끔 돈이 떨어져서. 물론 맨 처음 왔을 때는 늦은 밤에 길을 잃어서였지만."

전조는 능숙하게 바닥에 널부러진 지푸라기를 끌어모아 한 사람이 누울만한 자리를 안쪽에 마련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백옥당이 전조의 하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검을 내려놓았다.

"나는 어디서 자?"
"여기서 자려거든 저기 창가쪽에서 자면 될걸세. 짚은 나 한 사람 쓰기에도 벅차니 나가서 모아오게나."
"너, 치사하게 이러기야?"
"그러게 누가 따라오라고 했나? 난 내일 아침 일찍 나서야하니 말 시키지 말게."

전조는 피곤했는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곧 잠에 빠져버렸다. 백옥당은 전조를 한 대 쳐주려다가 전조가 자기 몸 챙겨가며 쉬겠다는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듣는듯해서 내버려두기로 했다.

폐가는 폐가라 창은 아예 흔적도 없었고 문도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백옥당은 하늘에서 밝게 비추는 달이 아름다워 왼쪽 다리만 쭉 뻗고 오른쪽 다리는 그대로 창 안에 떨어뜨린 자세로 창틀에 앉아 달을 구경하다가 잠들고 말았다.



다음날 햇빛을 받고 전조가 깨어났다. 그러나 백옥당은 잠자리가 불편해 자는둥 마는둥 하다보니 날이 밝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그는 함공도에서 나온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기도 하고 나와서 겨우 찾아낸 게 고양이였던데다 그 고양이에게도 푸대접을 받고 있다보니 스스로가 그렇게 불쌍해 보일수가 없었다.

"내가 함공도에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벽에 기대앉아 검을 만지작거리며 밖을 바라보았다. 본래는 혼잣말이었지만 백옥당의 목소리가 컸던지 저만치 멀리 서서 머리를 간단히 다듬고 관모를 쓰던 전조가 듣고 말았다. 그리고 전조는 너무도 솔직했다.

"아마 날라리 포교가 되어있을걸."

대답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옥당은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전조를 바라보고는 웃었는데, 그것은 전조의 대답이 워낙 어이없어서였다.

"어째서?"

주변은 조용했다. 전조가 세심해서라기보다는 운이 좋아 이런 곳을 찾아낸 거겠지만 하룻밤 정도는 그럭저럭 지낼만했다.

"함공도의 노도주가 아니었으면 지금처럼 여유롭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나? 뭔가 돈을 벌고 살아야할텐데 자네가 익힌 재주라고는 무공밖에 없으니 포교밖에 할 게 없겠지. 그래도 강호인인데 강도짓은 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네."

백옥당은 발끈해서 소리쳤지만, 전조는 그의 말을 조목조목 잘 받아쳤다.

"너같은 고양이도 호위직을 맡는데, 나는 포교나 할 거라는 거냐?"
"포교가 어때서 그러나? 개봉부에서는 범인들을 잡고 심리를 돕는 대단히 중요한 일인데.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럼 날라리는 뭐야?"
"나도 협객으로 지내봤기에 그 일상은 알만큼 아네. 놀고 싶으면 놀고, 자고 싶으면 자고, 길을 지나다 불의스러운 일이 보이면 일단 뛰어들고, 가끔 호적수가 나타나면 겨루기도 하고, 난 그리 지내다 돈이 떨어지면 일을 찾기도 했지만, 자네는 돈을 벌어본 적이 없을테지."
"그래서?"
"개봉부만 해도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계속 민첩하게 움직여야 한단 말일세. 나는 포대인의 일이고 말씀이라면 목이라도 내어놓을만치 그 분을 믿기에 이 자리까지 왔지만, 자네는 나보다도 훨씬 협객으로서의 기질이 강한 사람이라 그런 틀에 박힌 일은 절대 못할 것 같고, 그렇다고해서 윗사람의 명령을 따를 성격도 못 되고, 자유를 즐기니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면서 견뎌내려면 술꾼밖에 더 되겠나? 그러니 함공도 형제들, 특히 노도주에게 감사하면서 지내는 게 좋을걸세."

말이 막혔다. 뭔가 반박하고 싶었지만 확실히 틀렸다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백옥당이 제일 싫었던 것은 한치의 흐트러짐없이 말하는 전조의 태도였지만, 전조의 말도 태도도 백옥당이 꺾어버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겨우 생각나는대로 말을 내뱉었지만 그조차도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것이었다.

"네 말대로면 난 곡식 뜯어먹는 쥐와 다를 게 없잖아."
"쥐로 살아가는 것은 그래도 꽤 쉽지않나?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때는 쥐가 파먹는 곡식까지 계산해서 백성들에게 세금으로 받았다고 하더군. 사람들이 먹이까지 제공해주니 얼마나 편한가?"

전조의 목소리에서는 가볍기 그지없는 장난스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얼굴에서도 재미있다는듯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너 오늘 나와 결투라도 벌이고 싶은거냐?"
"계속 묻기에 알려준 것 뿐이지. 자네와 싸울 생각도, 논쟁할 시간도 없네. 난 개울가에서 세수나 하고 범인을 추격할 생각이니 자네도 개봉에 일없이 온 거면 함공도로 돌아가게나. 여비가 없으면 오늘 신시 이후론 개봉부에 들어가 있을테니 오면 빌려주겠네. 그럼…"

전조는 가볍게 손을 모아 포권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당연히 백옥당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전조! 에취! 어… 어…!"

전조가 잠든 이후로 멋있게 잔답시고 낮은 창틀에 올라앉아 자다가 밤이슬을 맞고 감기가 걸려버렸다. 게다가 홧김에 움직이려다 몸이 찬바람을 맞고 다소 얼어있었던 사실을 잊었다. 그래서 문으로 나가는 전조를 따라가려던게 다리가 꼬여 그대로 한 바퀴를 구르고 말았다. 흰 옷에는 흙이 잔뜩 묻었는데 전조는 한번 돌아보고 웃더니 그대로 가버렸다.



철저히 본인기준에서 전조에게 야박하게 버림받은 백옥당은 폐가에 더 머물 생각도 없고 제대로 쉴 곳을 찾고싶었다. 그러나 하루 사이에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오까지 길을 헤매다 터덜터덜 발을 옮기는 데 다시금 처량한 생각이 들어 그나마 빈손인 자신을 받아줄 곳, 강녕주방에 찾아가기로 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어이구, 왠일이냐? 나를 다 찾아온 걸 보니 분명 무슨 일이 있는거겠지?"

'어쩌면 그리도 잘 아십니까? 돈 좀 주세요.'라는 말은 마음속으로 삼켜버렸다.

"그럴리가요. 강호제일의 풍류남아가 일은 무슨 일이 있겠어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왔는데."
"네 말을 내가 어떻게 믿니?"

백옥당이 보기드물게 귀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강녕파파는 백옥당의 이상행동을 그저 웃어넘기기엔 너무나 예리했다.

"아니, 너 이게 뭐야? 옷이 왜 이지경이 됐어? 열도 조금 있는게, 감기걸렸니?"
"감기는요. 에취!"

백옥당은 거짓말을 할 줄 알았지만, 백옥당의 몸은 그렇지를 못해 참으로 시기적절하게 재채기를 했다.

"너 보나마나 어제 어디 이상한데서 잤지? 개봉에 와서 날 찾지 않고 쏘다니니 벌받은게야."
"별로 심하지 않아요. 감기가 걸린건 전조때문이라고요."
"왜 괜히 전조탓을 해? 안봐도 뻔해. 방해나 하지 않았으면 다행이겠다."
"어머니, 어머니는 제 어머니예요? 전조 어머니예요? 왜 항상 전조편만 들어요?"
"네녀석 행동은 보지 않아도 훤히 머릿속에 지나가는 걸 어쩌니?"

전조에게도, 강녕파파에게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백옥당은 더 이상 상대하기를 포기하고 의자에 앉아 그 날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강녕파파는 말 몇 마디에 삐진 백옥당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 던져주었다.



한편 비슷한 시각, 전조도 개봉부에 돌아와 있었다. 포증은 그 믿음직한 뒷모습만 보고도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대인, 범인은 감옥에 넣어두었습니다."
"수고했네. 나가있는 동안 힘든 일은 없었는가?"
"네."

백옥당이 조금 고생을 했지만 전조는 별로 힘들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창틀에 위태위태하게 기대어 잔 사람에 비해 안쪽에서 짚을 깔고 편히 누워 잔 것은 사치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게 단순히 상대적인 것일지라도. 오히려 전조의 입장에서는 고생스럽기보다는 아는 사람이 있어 재미있었다고 할까.

"잘 돌아왔네. 피곤했을 테니 가서 쉬게나."
"네."

밝게 웃으며 자신을 맞아준 포증 앞에서 물러나 밖으로 나가던 도중 장룡을 만났다. 인사를 나눈 다음, 전조가 물었다.

"혹시 오늘 날 찾는 사람이 없었나?"
"전대인을요?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런가? 알았네."

백옥당은 개봉에 더 머무를 여력이 없는 게 분명했다. 아침에 말해둔 게 있으니 찾아왔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은 모양이었다. 백옥당 정도라면 대단한 건 아니겠지만 감기도 걸려있었기에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역시 강녕파파겠지.'

신세질 수 없는 곳에는 가지 않았을테니 싫더라도 갈 수 있는 곳을 찾았을 것이다.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군.'

전조의 주변에도 좋은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백옥당에 대한 이 이야기는 전조에게 포증이 주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의미였다. 포증이 전조를 끊임없이 한 길로 이끌어가고 있다면, 백옥당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백옥당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켜봐주는 이들이었다. 현재에 충분히 만족하는 전조로서는 백옥당이 딱히 부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백옥당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곤경에 처했다면 필요한만큼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벗. 그 정도였다.

그러니 전조가 전조다운 삶을, 백옥당이 백옥당다운 삶을 살면서 족함을 느끼니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한 예로 전조는 자신이 백옥당에 대해 생각하는동안 백옥당이 감기가 도져 편히 자고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반대의 상황이 된다면 백옥당은 감히 내가 널 생각하는데 자고 있느냐며 분개할테니까.

짧은 생각에 짧은 하루, 그렇게 또 한번 고양이와 쥐의 치열했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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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생겁을 보고 썼습니다. '뛰쳐나와서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하다가 [...] 현재 글 상태로는 중반 정도에 해당하는 부분이 떠올라서 낙서하듯이 쓰다 앞뒤를 맞추다보니 당초 예상에 비해 양이 늘었습니다. 이래저래 리포트 4개를 써야하는 상황인데 쓰던 글에서 손을 놓지 못하게 되어 일단 대강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 당연히 부족한 부분이 많겠지만 돌은 너무 아프지 않게 살살 던져주세요.

쥐가 훔쳐먹는 곡식을 세금으로 받는건 5대 10국 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이존욱의 밑에 들어간 공겸이 세금을 걷기 위한 수단으로, 창고에 쌓아두는 곡식은 쥐가 벌레가 먹기 마련이라며 세금을 책정했는데 그 이름은 작서모세라고 했습니다. 백성을 못살게 굴고 싶었다기보다는 돈을 긁어들이는 수단이었지요. 결과적으로는 같은 이야기겠지만.